▲서(書)책 ‘서(書)’자는 붓(聿)과 아래의 그릇에 담긴 먹을 찍어 글을 쓰는 모습을 나타낸다.
漢典
중국의 4대 발명품은 종이, 나침반, 인쇄술, 화약인데 이 가운데 두 가지는 책(冊)과 관련이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책을 매우 중시한 나라이며 중국인들은 뛰어난 기록정신과 문자 숭배 전통이 이어져 풍부한 역사 기록물을 남겨 놓았다.
책을 나타내는 한자 '冊'은 죽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죽간을 가죽 끈으로 묶는데 공자가 <주역(周易)>을 여러 번 읽어 그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하여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책 '서(書)'자는 붓(聿)과 아래의 그릇에 담긴 먹을 찍어 글을 쓰는 모습을 나타낸다. 해서(楷書)체의 글자 형태를 지금 중국에서는 간체자로 사용하고 있다. '서(書)'자 발음은 'shū'인데 '(경기에서)지다(输)'와 발음이 같아서 공자님이 이사 간다고 하면 뒤에 자연스럽게 '온통 책이다(净是书)' 라는 말이 이어지므로 시합에서 졌다고 할 때 중국인들은 '공자님이 이사 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주자(朱子)가 선정한 유교 필독서인 4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가리킨다. 중국 문화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한 권의 책(最能代表中國文化的一本書)을 묻는 인터넷 설문조사에 중국인들은 4서 3경을 비롯해 사마천의 <사기(史記)>, <홍루몽(紅樓夢)>, 이백과 두보의 시집, 루쉰(魯迅)의 소설 등을 꼽았다.
진시황은 BC213년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는데 이때 불태운 책은 모두 죽간 형태의 것이고 춘추전국시대 이미 책의 보급이 이뤄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책에 적힌 옛 것을 가지고 진시황을 비방하던 학자 460명은 산 채로 땅에 묻혀야 했다.
진시황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화폐, 도량형, 문자, 사상 등 강력한 통일 정책은 중국 대륙이 유럽처럼 여러 국가로 분화하는 것을 막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수레는 같은 넓이의 궤도로 하고 문자는 하나로 같게 한다(車同軌, 書同文)는 정책이 없었다면 중국도 유럽처럼 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 구역으로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국시대의 다양한 금문(金文)을 진시황은 문자의 통일을 위해 소전(小篆)으로 통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분서를 단행했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의 분서 이후 한 무제에 이르러 옛 책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하는데 민간에는 다행히 불태우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었다. 공자의 후손이 노벽(魯壁)에 책을 숨겨 놓은 것이나 복생(伏生)이 구술로 사라질 뻔한 <서경(書經)>을 불완전하게나마 되살린 이야기는 중국인들이 책에 대해 얼마나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脩)는 장서 만 권, <집고록(集古錄)> 천 권, 거문고, 바둑판, 술 주전자와 자신을 합쳐 '육일거사(六一居士)' 라고 스스로 칭했으니 책을 자신의 또 다른 분신으로 여기던 고대 지식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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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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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발명품 중 2개가 책과 관련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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