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한 장면이다. 그 겨울, 나는 미카엘라였다. 그가 브뤼노였다. 그때 그 '야한 신'을 어떻게 연습했는지. 아무튼 나는 연기를 지지리도 못했다. 이래저래 공연은 무산됐고 <열인>은 깨졌다. 이제 추억거리로 아련하게 남았다.
정자에서 수박 쪼개 먹으며 지난날을 잠깐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계곡으로 물놀이 가자 성화였다.
다음날은 아침 먹고, 뱀사골 탐방안내소의 전시관으로 그의 식구들을 안내했다. 내 집에 오는 아이들 손님은 거의 필수코스처럼 가는 곳이다. 1층 전시관에서 지리산의 생태와 문화, 풍경 전시물들을 관람한다. 그리고 2층 전시관 <아! 지리산이여…>에서 한국전쟁을 전후한 지리산의 역사를 본다. 빨치산의 활동과 생활, 토벌대의 이야기를 빛바랜 흑백사진과 생활물품들과 영상으로 만난다.
그 전날 밤, 우리는 술상 앞에서 이런 대화를 했었다.
"한국 사람은 뭔가에 쫓기면서 사는 것 같아. 사는 게 다 불안해 보여."
박장렬이 말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분단 국가의 국민이라."
내가 말했다.
"그래. 역사나 정치적 상황들이 우리생활 전반에 걸쳐,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했다.
음정박자 무시하고 결혼 축가를 불렀던 그때
그가 지난해 봄, 서울연극협회 회장으로 MBC 파업에 지지성명을 했던 이유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치, 사회적 문제들이 예술계와 긴밀하게 연계된다는 점. 미치는 영향과 부조리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자각. 그는 그렇게 '소통, 나눔, 그리고 희망'의 입장에서 까놓고 지지발언을 했지만, '정치적 색깔'을 드러낸 짝이었다.
'연극계의 빨갱이'로 찍혔다. 이 나라에서는 보수권력을 비판하면 무조건 빨갱이, 종북으로 몰린다. 블랙코미디 같다. 웃긴데 아프다. 그 탓이었는지 올 초 4대 서울연극협회 회장 선거가 치열했었다. 마치 정치판의 보수와 진보, 양당의 대결처럼 붙었다. 결과, 그는 재신임을 거뜬히 얻어냈다.
<열인>이 흩어진 후로도, 그는 수십 년 동안 한 우물만 주구장창 팠던 것이다. 연극판에서 골수 연극인으로 살았다. 작품을 쓰고, 연출하고, 연극판을 새로 짜며, 또 <연극집단 반> 대표로 쉬지 않고, 빚더미에 올랐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이 그의 기를 꺾지는 못했다. 연중무휴로 가동되는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천력은 남달랐다. 연극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진정성은 누구도 쉽게 깝치지 못할 것이다.
"워크홀릭 같아요."
재화씨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선한 미소가 살짝 안쓰러워 보였다. 일 많은 남자와 사는 고충이 왜 없겠나. 두 사내아이 건사하랴, 연극예술강사 나가랴, '존경하는 선배님' 보필하랴…. 남편에게 잔소리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천생 박장렬의 따뜻한 짝이다. 그러니 박장렬이 자기는 결혼을 정말 잘 한 것 같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지 않나.
내가 14년 전 둘의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축가를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노래마을의 '그대의 날'을 불렀었다. 내 개성대로 음정박자 다 무시하고 열창했다.
'축하해요…. 오늘은 그대들의 날 그대 어느 어둠 앞에 서더라도 혼의 빛 잃지 않기를….'
사실, 더 일찍 그가 먼저 나에게 축가 선물을 했었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을 데려와 내 결혼식장에서 제대로 축가를 불러주었었다. 그것도 또 가물가물한 추억이다.
탐방안내소에서 나와 곧장 뱀사골을 타고 올랐다. 해발 800미터 와운마을까지 뚫린 찻길로. 빨치산의 은신처였던 뱀사골은 한국전쟁 전후 역사의 현장이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쫓고 쫓기는 전투지였다. 지금, 계곡의 비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와운마을에서 천년송(천연기념물 제424호)을 보러 능선을 걸어 올라갔다. 날은 뜨겁고 바람은 잔잔했다. 마타리 꽃이 능선을 노랗게 수놓았다. 거기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장쾌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해원아, 너 태어나서 8년이나 살았지만 처음 봤지? 이렇게 큰 소나무!"
내가 여덟 살짜리 해원에게 물었다.
"네. 나무가 너무 커요. 무서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해원이는 까불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에너지 넘치는 아이다.
연극 연출가와 작가로 만난 우리, 부딪칠수록 작품이 좋아졌다
수려한 소나무와 지리산 첩첩산중 풍광을 둘러보며 박장렬이 말했다.
"이런 무대면 좋겠는데…."
다시 작품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오고간 뒤였다. 그와 작품을 같이 한 게 벌써 7년 전 일이다. 그 해 봄에 어린이뮤지컬 <약초꾼 두리의 비밀>을 같이 올렸고, 여름에 <쐐기를 박아라>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집단자살 얘기였다. 주제는 심각하고 표현주의 연출법은 어려웠다. 배우들이 힘들어했다. 나는 자주 연습실에 찾아가 연습 중인 배우들을 들들 볶았다. 연출가인 그와 작품을 놓고 언쟁을 벌였다.
연출가와 작가의 언성이 높아지면 배우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주장을 세련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상대를 인신공격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따위의, 덜 떨어진 짓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게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작품의 단점이 보완되었다. 완성도가 높아졌다. 그러니 바람직한 싸움이었다. 100만원연극공동체5W페스티발(현재 '100페스티벌') 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일본 공연도 갔다 왔다.
그 후 그가 다시 작품을 같이 하자고 몇 번 제안을 해왔다. 나는 그때마다 딴 짓을 하느라 희곡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제안에는 혹한다. <연극집단 반> 20주년 기념 공연작이니 작품 쓸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부터. 우리가 다시 의기투합하여 작품을 만든다면, 작품이 잘 나온다면, 신날 것 같다. 한국의 역사로 <레미제라블> 같은 대작을 만든다면…. 청사진은 크게 잡고 보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물놀이를 갔다. 옥수수 몇 자루 쪄가지고. 말 수 적은 성원이는 한동안 잠자리에 빠져 있었다. 자기 손끝에 앉아 날아가지 않는 잠자리를 들여다보며. 물에 들어가더니 날래게 수영을 했다. 해원이는 첨벙첨벙 지치지도 않고 물장구를 쳤다. 계곡탐사를 하고, 물고기를 쫓아 다니고. 우리는 유쾌하고 날은 맑고 물은 시원했다.
저녁에는 건너편 동네 삼화리 언덕 집에서 초대를 받았다. 다 같이 가 삼계탕을 먹고 마침, 그 집을 방문한 학생동아리 '꿈꾸는 아이들'의 밴드연주를 들었다. 밤엔 다시 정자에 둘러앉았다. 매미, 잠자리, 벌, 거미…. 아이들은 달려드는 온갖 곤충과 벌레를 관찰하다가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은 정자에 남아 오래 술을 마셨다. 서로 사는 얘기를 했고, 작품 얘기를 했고, 그가 맡은 막중한 일 얘기들을 했고…. 휴대폰이며 지갑이며 모자며 물건들을 왜 그렇게 깜박깜빡 잘 잃어버리느냐고 내가 그를 핀잔주었고.
"장렬씨, 남자들은 대개 그렇다며? 이성간의 친구에게, 친구라고는 하지만 성적 욕망을 느낀다고. 맞아?"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맞아. 나는 좀 특수한 케이스지만…."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남자들의 그런 강한 욕망 때문에, 이성 간의 친구는 가능하지 않은 관계라고 말하는 것인가.
"요즘은 여자도 솔직하게 자기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하잖아요."
재화씨가 말했다. 사실, 인간은 모두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마하트마 간디도 '스스로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욕망의 거미줄에 붙들려 버둥댈 사람이 아니다. 또, 이 소중한 관계를 지켜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튼, 그는 나를 참 살맛나게 하는 친구다.
다음날 그들이 떠났다. 나는 청소를 하며 다음 약속을 확인했다. 이틀 후에는 인천에 사는 은교씨랑 진규씨가 온다. 초등학교 교사인 은교씨와 기타리스트인 진규씨는 원앙새 같은 부부다. 경우 바르고 의식있는 친구들이다. 볼수록 사람이 진국이다. 내가 2008년 촛불집회현장에서 연행되어 '빵'에 들어가 있을 때 진규씨가 갈아입을 옷 가지를 바리바리 챙겨다주기도 했다. 출소한 날은 두부를 사들고 왔었다. 늘 고맙고 고마운 친구들.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뜨거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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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입 맞춰줘요"... 가물한 추억이 '방울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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