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둠 속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인 서석화의 음악에세이] 홍종명 <내가 가야 할 길>

등록 2013.08.21 16:14수정 2013.08.2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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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의사는 나의 뇌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모든 의미에서 정지됐다고 결정할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의 나의 목적과 의욕이 정지되었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내 몸 안에 인공의 생명을 기계를 이용해서 불어넣으려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나의 임종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그 대신 그것을 <새로운 탄생>이라고 불러 주시고, 다른 사람들이 더욱 충실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도록 나의 몸을 나눠주십시오.

나의 눈을, 떠오르는 아침 해와 아기의 얼굴과 그리고 여인의 눈 속의 사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심장은, 끝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피를, 교통사고로 일그러진 차 속에서 구출된 십대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그의 손자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신장은 기계에 의존해 삶을 영위하는 형제에게 주십시오.
내 몸 속의 뼈와 모든 근육과 모든 세포와 신경을, 절름발이 아이에게 주시어 그 아이를 걷게 할 길을 찾아주십시오.
나의 뇌세포를 도려내어 말 못하던 소년이 함성을 지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소녀가 그녀의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를 듣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태워서 바람에 재를 뿌려 주시어 꽃들이 자라는 걸 돕게 하여 주십시오.


뭔가 묻어야겠다면, 내 잘못과 결점과 인간에 대한 나의 모든 편견을 묻어 주십시오.
내 죄악은 악마에게 주십시오.
내 영혼은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혹시 날 기억하시려거든, 당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친절한 행동과 말로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부탁한 모든 걸 해 주시면, 나는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 로버트 N. 테스트 'To Remember me - I'll live forever'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홍종명이란 가수가 있었고 그가 드라마 OST로 꽤 알려진 사람이었으나 작년 겨울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며 장기기증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것도 내 생일날 새벽에!

며칠 전 나는 여덟 번째 생일을 맞았다. 생물학적 나이를 두고 여덟이라는 숫자로 말하는 건, 내가 장기기증 서약을 한 뒤 흐른 햇수를 의미한다. 나는 마흔다섯 되던 생일날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 서약'을 했다. 무려 십 년이나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을 거친 후의 일이었다.

서른다섯 살 때 나는 문단 선배가 교수로 재직 중인,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한 고려대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연구실과 교수식당, 그리고 아버지가 다니셨던 법대 건물과 의과대학 등을 둘러보고 돌아 나오던 길이었다. 사람들의 이름이 한도 없이 많이 새겨진, 비석이라기엔 너무 크고 웅장한 돌과 마주쳤다. 학교 재정에 도움을 준 후견인이나 학교를 빛낸 인물쯤이겠지, 하고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데 이상하게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걸음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시력이 밝아져 그늘 뒤쪽까지도 보이는 것처럼 사람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내 앞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몸을 돌려 비석과 마주 섰다. 다정했던 사람과의 해후처럼 반갑고도 서러운 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선배 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들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시신이나 장기를 기증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뜻을 기리고자 이렇게 이름을 새겨 영원히 기억하자는 의미로 세운 거지요."

사람의 목소리가 새벽 물살처럼 이렇게 정신을 깨치며 계시로 다가올 수 있구나, 하는 걸 그때 나는 느꼈던 것 같다.

'그래, 이 느낌이 십 년 동안 변하거나 옅어지지 않고 한결같이 유지된다면 그때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한 서약을 하자.'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단 한 순간도 주저되거나 물리고 싶은 마음 없이 십년이 흘렀다. 드디어 십 년째 되던 내 나이 마흔다섯 생일, 나는 평생 한 번 만날 수 있는 연인을 만나는 만큼의 기쁨으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맑고 높은 음성으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하겠노라고 서약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연둣빛 바탕의 '사랑의 장기기증 등록증'이라고 쓰인 카드가 배달됐던 날, 나는 내 서재 책상 앞에 미국 장기기증 운동의 선구자인 로버트 N. 테스트의 글을 써서 붙였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연인의 정표를 보듯 숨가쁜 행복감에 젖게 하는 글이다.

이제 생애 최고의 서약을 한 지 여덟 번째의 생일이 지나갔다. 생일날 새벽 늘 해왔던 것처럼 로버트 N. 테스트의 글을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며 읽어본 후였다. 무심코 인터넷 창에 장기기증이라는 글을 쳐 본 내 눈에 '홍종명'이라는 생면부지의 이름이 떠올랐다.

우선은 지금 내 나이보다도 젊은 사람의 죽음이 안타까워 설핏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었다. 그가 떠나면서 장기기증으로 여러 사람들을 살렸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마부터 발끝까지 따뜻해지는 온기는 모르는 그로부터 받은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에게 마음이 붙잡혀 있다.

그가 불렀던 노래를 찾다가 제목에 마음이 간 게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의 OST로 삽입된 <내가 가야할 길>이다. 가사를 보니 그의 사연을 미리 알아서일까? 드라마 내용과는 별개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쓸쓸히 거닐던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아무도 내 곁에 없는 시간에 홀로 지새우고 싶지는 않아
이제 난 너에게 내 모든 걸 다 해 말하고 있어
이제 넌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의 빛이 된다고

두려워하지 마 너는 이제 혼자인 게 아니야
괴로워하지 마 모두 지워버려 다시 시작해
- 홍종명 <내가 가야 할 길> 중에서

홍종명! 그는 어둠 속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다 해 말하고 있다.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라고!'

나는 올해 내 생일에 썩 근사한 한 남자를 만났다.
#장기기증 #홍종명 #내가 가야할 길 #생일 #아름다운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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