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수업을 마치고 연변총각과 함께 찍은 사진
박현옥
"다음 주에 연변으로 돌아갑네다. 두 달도 혼자 와 있기는 너무 길어서... 손도 근질근질 하고 차라리 내가 수술을 하고 말지, 곁에서 지켜보는 게 더 힘듭네다."
연변 복지병원에서 온 의사 한 명이 7월부터 견학차 와 있었다. 무슨 의료 교류 프로그램으로 두 달 간 이곳에 나와 있다는데 거의 늘 수술실에서 수술 과정을 지켜보는 게 일인 듯 했다. 식당에서 항상 혼자 밥을 먹는 그가 맘에 걸렸다. 점심시간에는 좀 짬이 나는 것 같아 몇 명의 직원들과 함께 중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어릴 적 동네에 살던 "성깔은 다소 있지만, 맘씨 좋고 유쾌한 동네오빠 스타일"같아서 맘 편히 부탁할 수 있었다.
바쁜 일과 중 점심시간에 짬을 내는 30분이라 일분이 아까웠다. 처음에는 이 양반이 나타나지 않고 병원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해찰하고 있어 수업 시간에 찾으러 다녀야 했다. 하지만 차차 날이 갈수록 서로 가까워지다 보니 오히려 먼저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곤 한다.
공부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성조와 기본 발음만 약식으로 익히고 그 후부터 매일 순서대로 돌아가며 익히고 싶은 문구를 몇 개 적어내면 그가 미리 중국어로 번역해서 병음을 달아 왔다. 수업시간에는 복사한 그 종이를 가지고 설명해가며 따라 읽으며 익히는 정도였다.
수시로 튀어나오는 연변 사투리와 우리와는 사뭇 다른 표현 때문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 특유의 연변 말씨가 나중에는 정겹게 느껴졌다.
그의 이름은 이철봉(李哲峰)이다.
"한자를 풀이하자면 지혜의 봉우리 정도 되는 아주 좋은 이름인데 여기서 조선말로 부르니까 좀 이상합네다." 씩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는 31세 정형외과 의사다.
처음에는 병원에서도 겉도는 것 같아보였는데 매일 30분씩 꾸준히 만나다보니 우리와 정이 들어 '그새 두 달이 다 되었나?' 싶다. 중국어 구문을 핑계 삼아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 제일 인상 깊은 것이 뭐죠?" 거침없이 그가 대답했다.
"하~~ 정말 바쁘게 살고 돈을 너무 쫒는 것 같습네다. 우리에 비하면 다들 잘 사는 편인데 너무나 일만 하고 사는 거 같습네다. 주말도 없고 저녁시간도 없고. 무슨 재미로 삽네까? 그렇게 많이 벌면서도 친구에게 밥 한 번 편하게 사지 못한다면 왜 그래 사는 겁네까?" "주말에 낚시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뭐 그래 좀 없어도 맘 통하며 사는 게 좋지 않습네까? 곁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습네다."연변 총각의 말을 들으니, 내가 21년 전 미국에 몇 달 머물렀을 때 느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 대단하다는 미국이란 나라의 소시민 생활이 가까이서 지켜보니, 내 눈에는 빚을 잔뜩 지고 사는 할부 인생 같아보였다. 수십 년 장기 할부의 큰 집, 큰 자동차, 월말이면 수북이 쌓이는 고지서들. 몇 년을 일하던 직장에서도 오너의 "넌 해고다"라는 한마디로 박스에 물건 챙겨서 그날로 쫓겨나는 사회. 그 후론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하는 사회.
그 풍성하고 소비가 미덕인 듯 보이는 그 나라의 이면엔, 구르는 동전 같은 삶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어느 때라도 구르기를 멈추면 이내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마는 동전처럼 말이다. 그 대열에 끼기 위해서 숨 가쁘게 구를 수밖에 없는 엄청 활기찬 사회.
2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어느덧 우리의 생활도 그들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지. 개구리는 비커 속의 뜨거운 물에 갑자기 들어가면 놀라서 뛰쳐나가지만, 서서히 물이 끓으면 그대로 삶아져도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던가!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나 자신마저 잃어버릴 것 같은 요즘 세상의 속도에 오늘따라 멀미가 느껴졌다. 마치 비커 속의 개구리가 되어버린 느낌으로.
돌아가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고, 제주도 신혼여행도 고려하고 있다는 그 씩씩한 연변 총각. "좀 덜 벌어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는 게 좋지 않습네까?"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예전의 내 마음을 본다. 이 씩씩한 연변 총각이 나중에도 부디 지금의 맘을 잊지 않고, 가족과 함께 좋아하는 낚시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기를 빌어본다.
20년, 아니 10년 후의 연변은 어떤 모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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