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과 양치기 소년

등록 2013.08.30 19:58수정 2013.08.30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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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양치기 소년이 있었다. 양을 잘 치면 그만인 그일 테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일을 저질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다. 그렇다고 치는 양과 동떨어진 일은 많지 않았다. 하나의 묘책이 떠올랐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으러 왔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숫자의 다과엔 차이가 있지만 마을에 양을 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에 이것보다 좋은 소재는 없을 듯싶었다.

소년은 늑대가 내려왔다며 소리소리 질렀다. 눈이 휘둥그래진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늑대를 잡기 위해 모여 들었다. 소년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잘못 본 것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얼마나 양치는 일에 전념했으면 헛것이 보여겠느냐며 좋게 생각하고 돌아갔다. 한 번 재미를 맛본 소년은 그 뒤 주목 받고 싶을 때마다 "늑대야!"를 반복해서 외쳤다. 그리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헛탕을 치고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늑대가 내려와 양들을 닥치는 대로 해쳤다. 다급해진 건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늑대가 정말 내려왔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마을을 돌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번번이 속아 왔기 때문이다. 진짜 늑대의 출현으로 많은 양들이 잡아 먹혀 큰 손실을 입었지만 한 번 잃은 신뢰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양치기 소년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지금 국정원과 검찰이 한 진보 정당 의원을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내게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위의 '양치기 소년' 우화였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 내란을 계획하고 몰래 추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 가는 점이 없지 않은 것이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려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의 역사가 유신 시대로 후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답습하며 그런 데 적당한 인사를 요직에 앉혀서 국민 다수와 동떨어진 통치를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했다. 시대가 바뀌고 국민의 의식 수준이 전과 같지 않은데 설마 그렇게야 하겠는가 하고 내심 기대를 걸었다.

'내란 음모'라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종종 적용하는 죄목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뒤진 나라에서 상사(上士)가 쿠데타에 성공해서 반대파를 척결할 때 써 먹는 것이 바로 내란음모죄이다. 이런 죄목이 21세기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에 번연히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것도 국정원이 3년여동안 내사를 해 오다가 발표했다고 하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속담에 '외밭에서 신발 끈을 매지 말며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매지 말라'고 했다. 국정원의 발표 시기가 오묘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정권 유지를 위해 도구화된 국정원을 개혁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 여당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국정원의 선거 부정 개입을 규탄하는 목소리(성명서)가 전국의 각계각층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또 촛불 집회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국정원의 개혁과 국정원장 파면도 그 요구 사항 안에 들어가 있다. 성급한 사람들은 국정원을 폐쇄하라는 주장까지 한다.


이 글의 제목을 '국정원과 양치기 소년'으로 달았는데,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국가정보원에 이르기까지 정보기관들이 한 일들을 보면 딱 '양치기 소년'이다. 그들은 광주 민중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김대중을 내란 음모죄로 구속해서 사형시키려 했다. 그 전엔 이미 의로운 청년 몇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했다고 해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이름으로 엮어 사형을 선고했다. 더 큰 악행은 사형 선고 뒤 18시간 만에 집행, 세계의 지성들로부터 그날(4월9일)을 국제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불리기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 민청학련, 김대중 내란 음모 등의 사건은 최근 모두 무죄가 선고되어 국가가 해당자들에게 배상까지 해 주어야 했다. 정보기관의 악행이 국민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준 대표적 사례이다.

외국 언론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정권을 지켜주는 도구(tool)에 지나지 않는다. 정권이 위태로울 때마다 붉은 색을 덧칠해서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나는 국정원이 지난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그것을 덮기 위해 비공개 문서로 분류되어 있는 NLL 회의록을 일반 문서로 급조 공개할 때부터 그들의 끝이 어디일까 궁금했다. 검찰이 가감 없이 수사해 주기를 바라지만 증발한 NLL 문서도 국정원 소행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과거 행적을 반주해 보면 NLL을 공개하는 것뿐 아니라 이석기 의원 등을 내란음모죄로 덧씌워 사건을 충분히 조작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래서 '이석기 의원' 사건의 실체에 대해 신뢰를 하지 못한다. 국가 기관을 믿어야 하겠지만 그들은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 왔다. 이석기 국가 내란 음모 사건도 위기에 몰린 국정원이 연명해 보겠다는 마지막 카드에 불과하다고 본다. 먼저 NL이든 PD든 운동권 친구들의 국가관은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극우 보수 박근혜 정권의 인사들과는 차이가 있다. 내가 단언컨대 그들의 국과관이 현 정권과 다르다고 해서 북한과 쉽게 결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북한을 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공생해야 할 민족의 일원으로 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유치하게 북한을 찬양했다든지 주체사상을 옹호했다는 철지난 언어유희로 민주 진보적 인사들을 재단하지 말기 바란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통합진보당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 의석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합법 정당이다. 현 정부의 극우 인사들은 모든 국민이 극우 보수의 생각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겠지만 국민은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진보에서 극우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중층적(重層的)이다. 진보 정당의 인사가 국회에 진출했다는 것은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이 130여명과 모여 나눈 대화의 부분 부분 녹취록을 가지고 내란 음모란 올가미를 씌우려고 하는 국정원의 용기가 가상하다(당사자들은 황당하다며 국정원이 쓴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고 토로하고 있음). 시대는 하루가 멀게 변하고 있는데, 30년 이상을 역류해 과거 유신 때의 잣대로 '내란음모' 운운하는 모양이 무척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진보인사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는 극우 인사들이 나누는 것과는 다르다. 좀 비약이 있는 표현 같지만, 내가 경험하기로는 극우 인사들은 개인을 먼저 생각하고 진보 인사들은 공동체를 먼저 운위한다. 보수적 사고는 기존 틀의 유지를 바라지만 개혁적 사고는 변화를 꿈꾼다. 130여명이 모여 내란을 모의하고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그 모임의 실체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는 공개될 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100명이 넘게 모여 나눈 대화는 비밀 유지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법 전문가들의 의견도 그래서 이석기 의원 사건을 두고 내란음모죄 성립에 대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주위 사람들은 유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70대 중반인 김기춘 비서실장은 유신헌법 기초에 관계했고 그 뒤 반정부 인사를 때려잡는 공안 검사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황교안 법무와 홍경식 민정수석도 검찰 공안통으로 진보인사들에겐 악명이 높다. 여기에 양보 없는 극우인사로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남재준 국정원당이 합류하면 하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들이 돌고 있다. 사건도 안 되는 것을 꾸며서 사람을 잡아넣고 몇 년 뒤 무죄를 선고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풀이되지 말란 법도 없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나라는 운신의 폭이 그만큼 넓지 못하다. 북한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북 관계를 개선해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국제적 역학 관계를 잘 헤쳐 나가야 한다. 이럴 때 북한을 냉전시대의 시각인 주적(主敵)으로 설정하면서 관계를 향상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국력으로 치자면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인 북한이지만 그들을 적으로 관계하기보다는 동반자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이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양치기 소년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 결과 많은 양들을 잃게 되었고 나아가 신뢰까지 상실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잃은 것은 양뿐이 아니다. 신뢰의 상실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간관계가 깨졌다는 것이다. 국정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건을 만들 수도 있고 순간적으로 조작하기는 쉽지만 그럴수록 국민과의 신뢰 회복은 더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양치기 소년과 같은 거짓을 되풀이 한다면 국정원은 국민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갈 것이다. 이럴 바에야 없어지는 게 낫다는 얘기가 무성하다. 국정원 폐쇄가 불의한 정권을 위해서는 비극이 될지 모르지만 정의에 기초한 국가와 진리를 갈망하는 국민을 위해서는 기쁨의 일이 될 것이다. 지난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mj0691'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죄 #국정원 #양치기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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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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