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96세인 헤롤드 챕먼씨는 캐나다 협동조합운동의 산 증인으로 알려져 있다.
iCOOP(아이쿱) 협동조합 조사여행단
"단언컨대, 협동조합은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계속 이어질 수 없다!"올해 나이 96세, 헤롤드 챕먼씨의 말이다. 그는 캐나다 협동조합 운동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불린다. 지난 5월 28일 그를 만난 곳은 서스캐처원주 새스커툰의 조용한 은퇴자 아파트였다. 90살을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는 지금도 후배들을 위해 책을 쓴다고 했다.
우리에게 들려준 건강한 노(老) 활동가의 협동조합 경험은 캐나다 협동조합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또 그의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iCOOP(아이쿱)생협 활동가로서 조합원 교육의 한계성을 고민하던 하던 때에 챕먼씨의 이야기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웠다.
그로부터 들은 협동조합 역사는 그 자체로 훌륭한 교과서였다. 챕먼씨는 특히 자신의 경험 속에서 협동조합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말을 적어본다.
"협동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없으면 (협동조합은) 1.5세대 이상 나아가질 못해요. 1세대 때는 협동조합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 졌는지를 알고 있죠. 또 사회적인 이슈와 함께 협동조합을 합니다. 하지만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 이후 세대의 경우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96세 어느 건강한 노 활동가의 협동조합 이야기그는 어떻게 협동조합을 하게 됐을까. 1930년 대공황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심한 불황은 그의 고향 서스캐처원의 새스커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챕먼씨의 아버지는 당시 밀생산자협동조합인 휘트 풀의 조합원으로 농장을 경영했다. 하지만 몇 해 동안 반복되는 가뭄과 대공황 시절 곡물 가격의 급락으로 결국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챕먼씨 가족은 새스커툰에서 150km나 떨어진 북쪽마을로 이사를 했다. 다시 농장을 시작했지만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좋은 편도 아니었다. 챕먼씨는 힘들어진 가정환경 때문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우리로 따지면 고교 1학년까지만 다녔다. 이후 5년여 동안 그는 학교 대신 마을에서 협동조합을 직접 실천해 옮긴다. 자신의 마을회관(커뮤니티 홀)을 아예 협동조합 방식으로 새로 만들기도 했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서스캐처원대학 농대에서 농업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4학년 때는 협동조합 과목을 수강했다"고 말했다. 챕먼씨는 자신이 대학에 입학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939년 9월 9일에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 중반께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당시 서스캐처원에선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1944년 6월 선거에서 북미 유일의 사회주의 정당인 시시에프(CCF, Co_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연방협동조합당)가 승리하면서 주 정부를 구성하고 사회보장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의료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미 더글러스가 주지사로 취임한 후, 공적 영역을 강화하기 위한 공기업과 공영 자동차보험회사 등이 만들어졌다. 이어 협동조합을 통한 지역 경제 개발과 보편적 복지로서 캐나다 최초로 의료보험의 도입을 추진하던, 큰 변화의 시기였다.
챕먼씨는 대학 졸업 후 서스캐처원 주정부 농업부 관리 담당자로 농민들에 대한 평생교육을 담당하면서 협동조합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서스캐처원 주정부는 정부 부서로 협동조합부를 두고 소비, 신용, 커뮤니티 세 분야로 나누어 협동조합을 지원했다. 챕먼은 이 세 분야 외에 농업이나 임업, 수산업의 생산자와 주택분야 협동조합 담당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