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을 딛고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내전으로 무너진 집터(왼쪽) 바로 옆에 임시로 집을(오른쪽) 짓고 다섯가족이 몇 년째 살고 있었다
강은주
내전 동안 잔혹함에 있어서는 스리랑카 정부군도 결코 타밀 타이거즈에 못지 않았다. 내전 후반기 2009년 1월부터 종전이 선언된 2009년 5월 19일까지, 4개월 동안 정부군이 타밀족 반군 지역인 북부지역에 총공격을 시작하며 약 4만여명이 죽었다.
스리랑카 정부의 경고에 의해 국제구호단체와 UN 마저 떠난 후 목격자도 중재자도 없는 그 곳에서 정부군은 적십자 병원들마저 폭격하고 투항자들이나 식량 배급줄까지 폭격하는 등 제네바 협정에 명시된 전시 규율들을 두루 유린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이 시기에 정부군에게 끌려간 14만6000여명의 실종자들 행방에 대해서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까지도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실종자들 중 이미 죽은 이들도 있겠지만 어딘가에 수용되어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6년의 내전 기간에 정부군과 반군으로 인해 사망한 약 10만명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언제 어디서, 서로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워 싸우건 간에 그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슬픔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걸로 이미 명분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제국주의에 휘둘려 시작된 갈등의 근원에 대한 분노나, 내전을 좀 더 일찍 끝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들은 접어두고 우선은 내전 이후 현재의 인권상황을 짚어보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녹록지 않다. 스리랑카 정부는 실종자 문제에 대한 해결은커녕 언급하려 하지 않고, 사망자·실종자·수용자 가족을 포함한 타밀족을 계속해서 배척하고 있다. 또 타밀족 반군의 근거지였던 북부지역을 내전 이후 군사지역화 하고 있다. 우리 일행도 북부 마나르 지방에 들어서면서부터 검문소를 거치게 됐다. 마나르보다 더 북쪽인 물라티브 지역으로 가면서는 더 많은 검문소를 지나야 했다.
많은 검문소를 좀 더 수월하게 지나기 위해서 우리 일행 중 신부님들은 미사가 없는데도 더운 날씨에도 긴 수단을 입었다. 신부님들의 수단 덕분인지 수월하게 지나다녔는데 평소에는 검문이 까다롭다고 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 검문소들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되는 사건들이 아직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는 여전히 실종과 고문의 악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 북부에서는 4명 이상 모임도 불가능북부지역에서는 눈에 띄게 많은 검문소와 군부대들이 있었고 아직 해체하지 못한 지뢰 매설 지역들도 있었다. 북부의 군 밀집도는 민간인 5명당 군인 1명의 비율이라고 한다. 스리랑카 군 전체 규모의 4분의 3이 북부에 밀집돼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군부의 허가 없이 4명 이상의 모임이 아직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북부는 이전에 반군의 근거지였다 보니 반군의 훈련장소들과 은신처들도 많았는데, 그곳들을 이제는 마치 관광지처럼 둘러보도록 만들어놓았다. 스리랑카 정부는 반군진압과 내전종결을 정부 선전용으로 많이 쓰고 있었다. 9월 21일에 있었던 지방선거에 있어서도 여당에서는 반군진압을 성과로 내세워 홍보한다고 했다.
검문소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마을들이 있고, 전쟁의 상처가 관광이나 홍보용으로 쓰이는 모습이 묘한 느낌이면서도 한편 한국과 겹쳐지기도 했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한국에서 가보고 싶어하는 곳 중 하나인 DMZ, 민간인접근금지구역 안의 마을들과 지뢰 매설 지역들, 또 전쟁의 상처나 분단상황을 정치에 이용하기도 하는 것들이 떠오르면서 전쟁의 상처가 진행 중이라는 점이 닮아보이기도 했다.
스리랑카 정부 측 인사들은 내전 중에 고문·성범죄·무차별 학살 등의 전쟁범죄가 없었다고 강변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 학살전쟁의 꼭대기에서 사령관 노릇을 했던 국방부 장관 고타바야 라자팍사이다. 그는 "민간인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며 언제나 목청 높여 거대한 거짓을 말한다. 이 거짓을 바로 잡고 수많았던 전쟁범죄를 인정, 사죄하고 실종자 행방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해결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전쟁범죄도 내전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