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가 '동양의 진주'라 불리는 진짜 이유

스리랑카에서 내전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등록 2013.10.17 13:54수정 2013.10.1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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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일부터 10일까지 일주일 간 스리랑카 캔디에서 열린 9회 아시아 정의평화 활동가 회의(JPW·Jutice and Peace Workers Asia Pacific forum) 참석 차 스리랑카에 다녀왔다. 회의를 통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나 카리타스회 등 교구 안팎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 각국의 인권상황과 교회의 활동을 공유하고, 고민을 나눴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상황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소중한 이들을 만나게 된 특별하고 귀한 자리였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번 회의가 열린 스리랑카와 스리랑카의 인권 현실이었다.

아시아를 제대로 여행해본 적이 없는 내게 스리랑카를 포함한 남아시아의 이미지는 '추레할 것이다'였다. 참 창피하게도 솔직히 그랬다. 지역으로 분류하자면 내가 아시아 사람인데도 막연히 서구를 동경하고, 아시아는 복작복작하고 볼품 없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나 보다. 이제야 아시아에서 겨우 한 나라에 가보면서 말이다. 출국 전까지 스리랑카에 대해서 검색해보면서 식상하리만큼 많이 접한 수식어가 '동양의 진주'였다. 그리고는 뭔가 마력이 있는지, 갔다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스리랑카와 사랑에 빠진 듯 보였다.

그들이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에 찬사와 함께 올린 사진을 봐도 잘 모르겠는데 다녀온 이들은 스리랑카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반신반의로 갸우뚱하며 스리랑카로 떠나서는 나도 그 대열에 끼게 됐다. 하나 더 안고 온 것이 있다면, 흔히 여행지역으로는 기피하는 북부지역(그곳은 26년 간 지속된 내전의 중심지였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스리랑카 안에 여전히 진행 중인 내전의 상처를 알게 된 것이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따뜻하고 기품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열흘만에 스리랑카를 흠뻑 사랑하게 됐다. 사랑하면 궁금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계속 검색해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기저기서 정보를 구했다. 포털 검색만으로는 스리랑카에 대해 얻는 정보엔 한계가 있었다. 출국 전 여행자 보험을 들려고 찾아간 보험사 창구에서 스리랑카는 여행위험국가에 속해서 여행자 보험 가입이 안 된다고 했던 때가 생각났다. 분쟁지역으로 분류되어서 여행자 보험 가입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4년 전 2009년에 내전은 끝났다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곧 스리랑카와의 먼 거리, 차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전의 상처와 갈등이 계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한 항공사에서 스리랑카 직항을 띄웠지만, 항공사 광고의 이미지만큼 가깝지는 않았따.

두 민족 사이의 전쟁... 뿌리에는 영국 제국주의가 있었다

 북부 지역에는 내전 중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터들이 많았다.
북부 지역에는 내전 중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터들이 많았다.강은주

내전과 관련된 스리랑카 상황은 알수록 무척 복잡했다. 민족 문제와 종교 문제가 비극의 씨실과 날실이 돼 엉켜있었다. 알아갈수록 놀라면서 마치 사연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 기분이었다.


스리랑카 내전은 1983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지난 2009년까지 무려 26년 간 일어났던 전쟁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긴 내전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의 다수 민족인 싱할리(Sinhalese)족과 스리랑카 북부에 주로 살면서 분리독립을 요구했던 소수의 타밀(Tamils)족 간의 갈등이었는데 2009년 타밀족의 패배로 끝났다. 또 대부분의 싱할리족의 종교인 불교와 타밀족의 힌두교, 이슬람교 간의 갈등도 거기에 더해졌다. 불교가 타밀족에 대한 탄압을 지원하거나 묵인하고 또 반대로 힌두교, 이슬람교가 싱할리족을 적대시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즉 민족 갈등과 종교 갈등이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내전 이전의 상황으로 거슬러가자면 싱할리족과 타밀족이 사이가 좋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두 민족이 함께 영국의 식민정책에 맞서 싸우기도 했는데 영국이 두 민족을 이간질하는 정책을 쓰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수인 싱할리족의 우월감과 소수 타밀족의 열세로 갈등은 깊어지게 됐다. 깊은 갈등의 시작에 묻어있는 영국 제국주의의 독을 보면서 제국주의의 마수가 세계 곳곳에 안 뻗친 곳이 없구나 싶어 씁쓸했다.


1983년 7월, 타밀족 무장 반군 '엘람 해방 타밀 호랑이'(LTTE·아래 타밀 타이거즈)가 스리랑카 정부군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본격화됐고, 한때는 타밀족이 북부지역에 분리 독립을 거의 이루기 직전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밀 타이거즈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상하고 어린 아이들까지 전투에 투입시키는 등 명분과 동조를 잃어가며 세가 약해지게 됐다.

JPW 회의 기간 중 9월 5일에는 회의 참가자 모두 북부 마나르 지방으로 가서 내전으로 인한 실종자 가족, 수용자 가족을 만나거나 폐허가 된 지역을 방문했다. 킬리노치와 더불어 마지막 전쟁터였던 북부의 물라티브에서 방문한 한 가정은 내전 때 폐허가 된 집 바로 옆에서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팔에 총상이 있었고 22살인 아들은 내전 중에 타밀 타이거즈에 납치됐다가 탈출해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제네바 협정 어기며 대량학살 자행한 스리랑카 정부군

내전을 딛고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 내전으로 무너진 집터(왼쪽) 바로 옆에 임시로 집을(오른쪽) 짓고 다섯가족이 몇 년째 살고 있었다
내전을 딛고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내전으로 무너진 집터(왼쪽) 바로 옆에 임시로 집을(오른쪽) 짓고 다섯가족이 몇 년째 살고 있었다강은주

내전 동안 잔혹함에 있어서는 스리랑카 정부군도 결코 타밀 타이거즈에 못지 않았다. 내전 후반기 2009년 1월부터 종전이 선언된 2009년 5월 19일까지, 4개월 동안 정부군이 타밀족 반군 지역인 북부지역에 총공격을 시작하며 약 4만여명이 죽었다.

스리랑카 정부의 경고에 의해 국제구호단체와 UN 마저 떠난 후 목격자도 중재자도 없는 그 곳에서 정부군은 적십자 병원들마저 폭격하고 투항자들이나 식량 배급줄까지 폭격하는 등 제네바 협정에 명시된 전시 규율들을 두루 유린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이 시기에 정부군에게 끌려간 14만6000여명의 실종자들 행방에 대해서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까지도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실종자들 중 이미 죽은 이들도 있겠지만 어딘가에 수용되어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6년의 내전 기간에 정부군과 반군으로 인해 사망한 약 10만명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언제 어디서, 서로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워 싸우건 간에 그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슬픔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걸로 이미 명분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제국주의에 휘둘려 시작된 갈등의 근원에 대한 분노나, 내전을 좀 더 일찍 끝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들은 접어두고 우선은 내전 이후 현재의 인권상황을 짚어보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녹록지 않다. 스리랑카 정부는 실종자 문제에 대한 해결은커녕 언급하려 하지 않고, 사망자·실종자·수용자 가족을 포함한 타밀족을 계속해서 배척하고 있다. 또 타밀족 반군의 근거지였던 북부지역을 내전 이후 군사지역화 하고 있다. 우리 일행도 북부 마나르 지방에 들어서면서부터 검문소를 거치게 됐다. 마나르보다 더 북쪽인 물라티브 지역으로 가면서는 더 많은 검문소를 지나야 했다.

많은 검문소를 좀 더 수월하게 지나기 위해서 우리 일행 중 신부님들은 미사가 없는데도 더운 날씨에도 긴 수단을 입었다. 신부님들의 수단 덕분인지 수월하게 지나다녔는데 평소에는 검문이 까다롭다고 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 검문소들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되는 사건들이 아직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는 여전히 실종과 고문의 악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 북부에서는 4명 이상 모임도 불가능

북부지역에서는 눈에 띄게 많은 검문소와 군부대들이 있었고 아직 해체하지 못한 지뢰 매설 지역들도 있었다. 북부의 군 밀집도는 민간인 5명당 군인 1명의 비율이라고 한다. 스리랑카 군 전체 규모의 4분의 3이 북부에 밀집돼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군부의 허가 없이 4명 이상의 모임이 아직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북부는 이전에 반군의 근거지였다 보니 반군의 훈련장소들과 은신처들도 많았는데, 그곳들을 이제는 마치 관광지처럼 둘러보도록 만들어놓았다. 스리랑카 정부는 반군진압과 내전종결을 정부 선전용으로 많이 쓰고 있었다. 9월 21일에 있었던 지방선거에 있어서도 여당에서는 반군진압을 성과로 내세워 홍보한다고 했다.

검문소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마을들이 있고, 전쟁의 상처가 관광이나 홍보용으로 쓰이는 모습이 묘한 느낌이면서도 한편 한국과 겹쳐지기도 했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한국에서 가보고 싶어하는 곳 중 하나인 DMZ, 민간인접근금지구역 안의 마을들과 지뢰 매설 지역들, 또 전쟁의 상처나 분단상황을 정치에 이용하기도 하는 것들이 떠오르면서 전쟁의 상처가 진행 중이라는 점이 닮아보이기도 했다.

스리랑카 정부 측 인사들은 내전 중에 고문·성범죄·무차별 학살 등의 전쟁범죄가 없었다고 강변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 학살전쟁의 꼭대기에서 사령관 노릇을 했던 국방부 장관 고타바야 라자팍사이다. 그는 "민간인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며 언제나 목청 높여 거대한 거짓을 말한다. 이 거짓을 바로 잡고 수많았던 전쟁범죄를 인정, 사죄하고 실종자 행방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해결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전쟁범죄도 내전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었다.

 지뢰 매설 지역(왼쪽 사진)과 타밀 반군 최고지도자의 은신처였던 곳(오른쪽 사진). 지하 깊은곳의 은신처 안에는 사진 속 회의실 등 다양한 용도의 방들이 많았다.
지뢰 매설 지역(왼쪽 사진)과 타밀 반군 최고지도자의 은신처였던 곳(오른쪽 사진). 지하 깊은곳의 은신처 안에는 사진 속 회의실 등 다양한 용도의 방들이 많았다. 강은주

지난 8월 27일 자정무렵에 내전으로 폐허가 된 트린코말리의 한 마을에 몇몇 군인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군인들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인 나비 필라이가 스리랑카에 와서 만나고 갔던 실종자 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들, 천주교 신부를 만나서 나비 필라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물었다. 필라이는 스리랑카 정부의 초청을 받고 왔는데도 말이다. 내전으로 실종된 가족들을 찾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힘든 실종자 가족들에게 스리랑카 군부는 고통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캐고 다니는 데에 쓸 노고(?)를 실종자들의 행방을 밝히고 함께 해결하는 데 기울이면 좋을텐데 말이다. 심지어 스리랑카 정부 측 사람들은 내전 사망자의 유족·실종자·구속자 가족과 그들을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들을 '테러리스트 조력자·후원자(terrorist supporter)'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내전으로 인한 갈등과 상처가 여전하다는 것을 오히려 스리랑카 정부가 보여준 셈이다.

필라이는 스리랑카 북부지역의 군사화·소수 종교 탄압·정치범 수용 등에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내전 희생자 및 그의 가족에 대해서 제대로 대우하고, 정의와 진실·평화를 존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화해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도 고문받고 죽어가는 이들이 있는 곳

타밀족 정치범이었던 니말라루반은 2012년에 감옥 안에서 고문을 받고 죽었다. 내전은 2009년에 종결됐다지만 2012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고문받고 죽어가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전쟁과도 같은 폭력은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할 수밖에. 내전이 끝난 뒤 4년이나 지난 뒤에도 스리랑카 보안부대가 타밀족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고문을 자행하는 것과,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납치·살해됐던 것에 국제인권단체들이 보고서 발표 등을 통해 스리랑카 정부를 비판해왔다.

국제사회와 다른 여러나라의 시민들도 스리랑카의 평화를 염원하고 주시해왔다. 그러나 한편 내전 기간에 스리랑카 정부군을 무기와 자본 등으로 지원하고 학살전쟁을 부채질 했던 세력도 있었다. 중국·인도·러시아가 바로 그들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내전 이후 스리랑카 재건사업에 있어서도 이권 다툼을 보였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스리랑카 문제 개입에 미온적인 태도로 끌어오고, 어렵게 결성된 진상조사위 활동 실행에 의지박약을 보이는 등 오점을 많이 남겼다. 이 학살전쟁을 이끌었던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만든 스리랑카 국내의 '교훈과 화해 위원회'에 진상조사를 맡겨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제사회는 독립적으로 전범조사를 면밀히 해나가고 전범재판을 결의해야 한다.

스리랑카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갈등해결을 위해 오랜 시간 힘들게 애써온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한편으로는 그에 반하는 이들도 교회 안에 함께 있었다(스리랑카 국민 중 가톨릭 신자는 120만 명 정도이고 비율로는 낮은 편이다, 국민의 70%가 불교, 힌두교가 12%, 이슬람교가 10%, 가톨릭이 6%이다). 스리랑카 안에서 소수종교인 가톨릭이지만 전쟁피해자의 편에 서서 구호활동을 해오고, 갈등해결을 위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스리랑카 가톨릭 교회의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싱할리족과 타밀족 간의 갈등이 있어왔다.

비교적 최근인 유엔인권최고대표 필라이의 방문 때에도 수도 콜롬보에서 필라이와 면담이 약속된 실종자 가족들과 타밀 신부들이 북부에서 콜롬보로 이동하는 중에 경찰에 제지당하며 고생을 겪을 때 싱할리 신부들은 여기에 함께 하거나 경찰의 행동에 이후에 항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바티칼로아 교구의 한 싱할리 주교는 필라이의 방문을 의식해 마힌다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과 군부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가톨릭 신자이자 인권 활동가인 한 친구는 스리랑카 가톨릭 교회 안의 이러한 분열이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라고 했다. 필라이의 방문이 스리랑카의 인권 상황을 보여주고 알리는 계기였던 동시에 스리랑카의 가톨릭 교회 내의 분열을 다시 한 번 보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물론 전쟁 피해자의 편에서 함께 하는 싱할리 사제들도 있지만, 하나된 교회를 지향하는 가톨릭교회 안에서조차 분열을 보일만큼 민족 간 갈등은 깊었다.

'테러리스트'라는 비난 들으며 약자의 편에 선 사람들

 라야프 조지프 주교와 스리랑카의 인권 상황, 한국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문제점 등을 함께 나누고 연대의 뜻을 전했다.
라야프 조지프 주교와 스리랑카의 인권 상황, 한국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문제점 등을 함께 나누고 연대의 뜻을 전했다.강은주

전쟁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해온 성직자들 중에서도 정부군에 의해 납치돼 실종되거나 고문·살해된 사제들이 10여 명이 넘는다. 이렇게 사라진 사제들을 비롯한 많은 실종자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전쟁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애써온 대표적인 인물이 북부 마나르 교구의 라야프 조지프 주교다.

조지프 주교는 내전 종결 이후에도 스리랑카 정부기관인 '교훈과 화해 위원회'에 실종자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독립성이 결여된 정부소속의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자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사제들과 2012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서한을 제출했다. 그 결과로 스리랑카의 인권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유엔에서 통과됐다.

그후 정부와 정부를 지원해온 불교계 정당·스리랑카 가톨릭 교회 내의 싱할리 사제들을 비롯한 보수파들은 국제사회에서 스리랑카를 욕보였다면서 조지프 주교와 성직자들을 '반역자'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그 비난의 대열에는 스리랑카의 앨버트 말콤 란짓 추기경도 있었다. 심지어 란짓 추기경은 민족 간 중재에 나서며 갈등해결을 위해 조지프 주교와 함께 애쓰기도 했던 추기경이었는데, 전후 인권상황 대응에 있어서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런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됐던 지난 콘클라베에서 아시아의 유일한 교황 후보로 꼽히며 스리랑카 교회와 국민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들어가며 전쟁 고아·미망인·탈출한 소년병들의 편에 서서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싸워 온 주교. 그리고 수많은 전쟁피해자들과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의 가족을 잊고 돌아서서 앞서 가는 것에 가치를 둔 추기경. 문득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이야기한 A.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가 떠올랐다.

풍광에 흠뻑 반했던 스리랑카에서 만난 그들이 곧 '동양의 진주'였다. 계속 되는 내전의 아픔 속에서 삶을 다시 살아내는 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불안한 신변이나 망명과 같은 생활도 무릅쓰는 진짜배기 활동가들, 명예와 안위를 잊고 약자들의 손을 잡고있는 종교인들. 그들이 세상의 눈물로 진주를 만들고 있었다.

직접 만나고 오기 전까진, '국제 연대'는 조금은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국내 인권상황도 전부 챙기지 못하는데 바다 건너 일까지야…'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분산이 아니라 총합이 커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새로 들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활동을 하면서 국제연대에서 받았던 힘을 기억한다.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인권이 무시되는 것을 눈감는다면 여기 나한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흙밭에서 진주 같은 이들이 사라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지켜봐야 함을 마음으로 알게 됐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강은주님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스리랑카 #스리랑카 내전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 #스리랑카 북부 #타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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