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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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들어온 주한미군은 그 전까지 있었던 주한'일'군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주한미군은 한국인들에게 굴종적 사대주의를 강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은 주한미군을 이용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주한미군에 빌붙은 한민당 계열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미국 앞에서 신조를 꺾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공민왕이 죽은 이후의 행적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공민왕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인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 정권은 선왕의 반몽골(반원) 정책을 폐기하고 친몽골로 돌아섰다.
그러자 이에 맞서 반몽골의 기치를 내건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이때 그는 서른네 살이었다. 조정이 이미 친몽골로 돌아선 상황에서 별다른 힘도 없는 그는 용감하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명분을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정권에 반기를 든 정도전은 전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유배를 떠나기 직전, 정권 핵심부에서는 그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하면서 그의 반응을 떠보았다. 유능한 청년 관료를 어떻게든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것에 아랑곳없이 서둘러 유배지로 떠났다. 그때 함께 귀양을 떠난 동료들은 2년 만에 조정에 복귀했지만, 그는 유배가 해제된 뒤에도 복귀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재야를 떠돌았다. 유배를 떠날 때의 행동으로 인해 정권 핵심부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는 삼각산에서 삼봉재란 사설학원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정도전은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의한 강자'에 맞서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강 미국과도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한미군을 등에 업고 동족을 굴종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면서까지 자기 꿈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은 자주성이라는 명분을 중시했기 때문에, 김구나 여운형 같은 지도자들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여운형은 해방 직후의 전국 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주한미군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김구는 혼란한 시대를 평정할 만한 확실한 그 무언가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20세기 정도전은 두 지도자를 마음속으로 존경하되 그들에게 의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멀리서나마 두 지도자가 잘되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럼, 정도전의 눈에 비친 이승만은 어땠을까? 이승만은 강력한 조직은 없었지만, 오랜 미국 활동 덕분에 국제적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실체와 관계없이 8·15 이후의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그를 선택할 수 없는 이유가 최소 다섯 개는 있었다.
첫째, 이승만은 한민족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주한미군과 손을 잡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승만은 정도전이 볼 때 '아웃'이었다.
둘째, 이승만은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얻은 대통령 직함을 갖고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면서도, 그는 직함에 따른 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또 그는 구한말에 자기의 석방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대신해 아버지를 봉양해준 조강지처 박승선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이승만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셋째, 이승만은 일관성이 없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에 이승만은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으로 독립을 획득하자'고 주장하면서 어느 정도는 일본의 지배를 긍정했다.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그는 "(강점 이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며 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자, 이승만은 종전의 태도를 바꿔 "한국을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놓아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그가 해방 직후에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의 원칙은 별다른 명분도 없이 상황에 따라 수시로 뒤바뀌었다.
일관된 신념 없이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이승만에게 정도전이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뚝심 있게 자기 길을 가는 무인 이성계에게 매력을 느낀 데서 나타나듯이, 정도전은 이승만 같은 인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넷째, 이승만에게는 사람들이 잘 따르지 않았다. 상해 임정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승만은 직책에 수반되는 권한은 향유하면서도 거기에 따르는 책임은 잘 이행하지 않았다. 또 그는 공금에 대해서도 투명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어필하는 데는 열성이었지만, 진심과 성실성으로 자기만의 대중조직을 구축하는 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승만의 명성에 비해 조직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저런 인물을 모시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승만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