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화천공사
최인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을 발표했다. 차가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된 호스티스 경아의 사랑 이야기였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등으로 한층 검열이 강화돼 새마을운동 영화와 전쟁영화,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영화들이 판치던 영화계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이 베스트셀러 소설은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했다.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 보는군" "아저시, 추워요. 안아주세요"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등 낯간지러운 명대사를 만들어 낸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앞세워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주관객은 정든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온 우리들의 누이들이었다. 누이들은 밤샘 작업을 해서 번 돈으로 소설책을 사 보고, 또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별들의 고향>에 이은 또 하나의 히트작 <영자의 전성시대>도 1970년대 우리 누이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무작정 상경한 영자가 식모로 일하다 성폭행 당한 뒤 버스안내양을 거쳐 외팔이로 청량리 588 직업여성으로 전락한다는,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스토리였다.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한국 영화계는 호스티스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만다. 순박한 시골처녀가 다방에서 일하다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꽃순이를 아시나요>와 <오양의 아파트> 역시 누이들의 기구한 삶을 다뤘다.
또 자유연애를 표방하는 여대생을 다룬 장미희의 출세작 <거울여자>와 호스티스로 살다가 스물여섯 살에 생을 마감한 여주인공의 애처로운 삶을 다룬 <26×365=0> 등은 당국의 검열 강화로 의식있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시대상황이 낳은 결과였다.
경아나 영자는 어쩌면 대한민국을 경제부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일지도, 혹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좋은 남자 만나서 살림 차리고, 토끼 같은 자식 낳아서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이었던 소박한 경아와 영자 누나는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행복할까.
흑백시대 대표작 <수사반장>과 컬러시대 대표작 <전원일기>금성TV. 1966년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요술상자'의 이름이다. 지금의 LG가 만든 이 흑백TV는 고단한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마법과 같았다. 여름날 저녁 시골 마을의 안마당에 TV를 내놓고 온동네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었다.
MBC가 1974년 방영을 시작한 <타잔>은 흑백TV 세대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리즈다.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치타 흉내를 내는 것이 대유행이 됐다. 당시 <타잔>의 인기가 짐작된다.
또, 1972년 KBS를 통해 전파를 탄 <여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분이(태현실 분)가 최주사댁의 모자라는 아들(장욱제 분)과 결혼한다는 신산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여로>는 명실상부한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70년대 힘들었던 삶을 살아야 했던 대다수 국민들은 드라마를 보며 마치 자기 일처럼 혀를 차고 눈물을 훔쳤다. 하루하루 울고 싶도록 힘든 삶에 지쳐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드라마를 핑계로 실컷 울 수 있었다.
1975년 매주 토요일 저녁, 전국의 까까머리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지직거리던 흑백화면 앞으로 불러 모았던 인기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시추에이션 국민드라마 <전우>였다. TV가 없는 아이들이 오죽하면 동네 만화방에서 눈물을 머금고 거금 10원까지 주고 기를 쓰며 이 드라마를 봤겠는가.
'반공방첩'의 기치 아래 북한을 '괴뢰도당'이라고 부르던 그 시절, 극악한 괴뢰군들을 용감무쌍하게 무찌르던 국군의 활약은 전 국민의 혼을 쏙 빼놓고도 남았다. 특히 늠름하고 멋진 소대장(나시찬 분)의 말 한 마디에 죽음의 공포를 조국의 품에 기꺼이 바치던 부대원들의 모습에 수많은 아이들은 열광했다. 그 시절, '별셋'이 부른 주제곡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후 10월부터는 간첩 잡는 대공기관 '113 수사본부'의 활약상을 그린 반공 드라마 <113수사본부>(문화방송)가 나왔다. <113수사본부>는 난수표 해독·독침사건 등 매주 한 차례씩 간첩의 흉악함을 소재로 구성된 일종의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 정리하면 간첩단 사건을 소재로 일일드라마를 만들어 내보낸 것.
이 드라마는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부풀린 소재에 허구까지 덧붙여 제작됐다. 온국민의 의식속에 '반공의식'을 심기에 충분했다. 텔레비전이 있는 친구네 집에서 <113수사본부>를 본 뒤 컴컴한 언덕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갈 때, 뒤에서 간첩이 따라오는 것만 같아서 집을 향해 마구 달리던 기억이 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