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옆에 있다.
김종성
가문과 운세와 두뇌에 더해, 하륜의 양 날개에 '윤활유'를 발라준 것이 있었다. 열여덟 살 때인 1365년에 하륜의 두 날개에 각각 윤활유가 지급된다. 이 해에 하륜은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의 시험관이 이색과 이인복이었다는 점은 하륜에게는 일대 행운이었다.
시험관이란 존재는 오늘날의 수험생에게는 커닝이나 잡아내는 호랑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수험생에게는 합격 후에 평생토록 사제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떤 시험관을 만나느냐'도 과거급제 이후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험관인 이색은 정도전·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이색과의 인연은 하륜이 개혁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태종실록>에 수록된 '하륜 졸기'에 따르면, 또 다른 시험관인 이인복은 하륜에게 첫눈에 반해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인복의 또 다른 동생인 이인임은 9년 뒤에 출현한 우왕 정권의 최고 실세였다. 이인복과의 인연은 하륜을 보수파 실력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만들었다. 이로써 하륜은 보수파와도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이런 요인들은 하륜의 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리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가 신진사대부 내에서 온건파가 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개혁하는 것은 좋지만 고려를 없애는 것은 불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하륜은 고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왕조에 충성할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처럼 행동했지만 막상 조선이 세워지자 이방원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점, 이방원이 왕이 된 뒤에 부정축재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컸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하륜은 결코 고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륜의 충성심은 매우 유동적인 것이었다. 고려왕조 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점, 보수파 이인임이 인척이라는 점 등 때문에 고려에 대한 충절을 표방했던 것이다. 하륜은 고려왕조와 이인임 정권이 영원하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륜이 볼 때, 이인임 정권에 대항했다가 유배 및 야인 생활로 전락한 정도전의 행보는 주된 관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의 능력은 이인임 정권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하륜은 '왜 저만한 능력을 갖고 저렇게 살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하륜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마흔한 살 때인 1388년에 최영과 이성계가 손잡고 이인임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 이성계의 배후에는, 이미 1383년부터 이성계 캠프에 가담한 정도전이 버티고 있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 전개와 함께, 하륜은 구(舊)정권 인사로 몰려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같은 해에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성계 쿠데타)은 하륜에게 극전인 반전의 기회를 줄 듯했다. 요동(만주) 정벌을 반대하는 하륜의 입장이 이성계의 쿠데타 명분과 일치했기 때문에,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성계 공동정권이 무너지고 조민수-이성계 공동정권이 성립한 뒤에 하륜은 다시 정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복귀한 뒤로도 하륜의 삶은 계속 가시밭길이었다. 인척인 이인임이 무너지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권력의 주변부로 내몰린 신세였다. 조-이 정권 하에서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그는 또다시 유배를 당했다. 40줄에 들어선 하륜은 생전 처음으로 고난이란 것을 겪게 된 셈이다.
하륜의 썩은 동아줄 정몽주,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