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에 왜 열광할까

'수용자' 중심의 고려대 대자보의 소통, 학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다

등록 2013.12.15 14:47수정 2013.12.1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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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민영화에 반대하는 학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지지한 '서울역나들이'참가자들의 깃발. ⓒ 이희훈


가슴이 먹먹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고려대 대자보를 읽었기에. 고민이 이어졌다. 일명 나들이라 불리는 집회(14일)에 참여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주저도 했고 이 과정에서 합리화도 해 봤다. 지금은 시험기간이고. 4학년이고. 알바도 해야하고, 당장 참가해야 할 공모전도 있으니까. 그러던 중 후배가 페이스북에 집회참여를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

"간다. 시험 공부 빠이."

고민하고 주저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왕년에 학생회 활동하며 집회 좀 다녔고, 사회 고민좀 해봤다고, '신문 커뮤니케이션'이나 '여론과 사회' 수업 때 후배들 앞에서 힘주어 말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니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그 후배만이 아니다. 주저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 이들이 많았다. 내가 변명거리를 만드는 동안 집회 현장에 일찌감치 참여한 후배들이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는 개설 이틀 만에 '좋아요'수 가 무려 11만에 달했고, 현장에는 3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지금도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 응답하는 대자보가 게시됐고 확산되는 추세다.

왜일까. 겨우 대자보 한 장이, 기획되지도 동원되지도 않은 일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든 것일까.

전국에 수 백개 대학이 있다. 매일같이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대자보를 써서 게시한다. 사회를 비판하고 학생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은 차고 넘친다. 그야말로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단 하나의 대자보가 화제가 됐다. '비결'이 있음이 분명하다. 전국에 음식점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추운 날 줄 서가며 찾는 '맛집'은 흔하지 않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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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 집회에 합류한 '안녕들 하십니까' 시위대. 고려대와 시청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후 서울역 철도노조 집회에 참여한 '안녕들 하십니까' 시위대의 모습. ⓒ 금준경


운동권이 아닌 대학생들, 거리로 나선 까닭은?


시청에서 이른바 '안녕들 하십니까' 시위대와 합류했다. 300여 명이 참여한 대학생 집회면 수 많은 깃발이 나부껴야 정상이다. 과거 <21세기 한국 대학생연합>(이하 한대련) 집회의 경우 지역대련 깃발과 학교별, 또 학교 내에선 단과대 및 학과 단위별 깃발이 나부끼곤 했다. 그런데, 깃발이라고는 달랑하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문구의 손글씨가 적힌 투박한 깃발이다.

그 뒤로 줄지어 걷는 300여 명의 학생들에게선 비장함보다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학교별로 뭉쳤다기보단 두 세명씩 끼리끼리 다니거나 혼자 다니곤 했다. 이른바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이 주최한 집회와는 다른 풍경이다. 기억을 더듬어 비슷한 광경을 찾자니 2008년 촛불집회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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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광장으로 향하는 '안녕들 하십니까'시위대 이른바 고려대 대자보를 계기로 모인 이날 시위대는 기존 운동권 단체의 집방식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300여명의 인원이 참여했지만 깃발은 단 하나 뿐이었다는 점과 각자 자신만의 피켓을 만들어온 점이 운동권 집회와 다르다. ⓒ 금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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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피켓문구를 적는 시위참여 대학생 이른바 고려대 대자보를 계기로 모인 이날 시위대는 기존 운동권 단체의 집방식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기획되지 않고 동원되지도 않은 집회인 까닭에 자신이 준비해온 종이에 자신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현장에서 적는 모습이 보인다. ⓒ 금준경


물론 집회 참여자 중에는 운동권 단체 소속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참여자 중 일부일 뿐이었다. 깔끔하게 출력된 운동권의 피켓은 많은 집회참여자의 손글씨 피켓과 대조됐다. 대부분이 도화지나 노트에 손으로 글씨를 쓴 터라 운동권 단체의 피켓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기도 했다. 시위대가 시청광장과 서울광장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동안 '민중가요'를 부르거나 율동에 맞춰 춤을 추거나, 8박자 구호를 외치는 일도 없었다.

사실 노동 분야와 민영화 문제는 <한대련>과 <노동자연대 다함께>와 같은 운동권 단체가 이미 오랜 기간 다뤄 온 담론이다. 하지만 그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청년들이다. 그렇다면 운동권 단체의 주장과 달리 '안녕들 하십니까'가 큰 반향을 일으킨 힘의 근원은 담론 소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같은 담론일지라도 어떤 맥락으로 다루느냐와 어떻게 확산시킬 것이냐의 문제, 즉 소통방법의 차이가 있음이 분명했다.

학생을 이야기하지만 학생과 소통 않는 운동권과 달라

'지지한다'가 아니면 '규탄한다', '물러가라', '사죄하라'는 표현으로 끝나는 제목. 시작부터 복잡한 사회현안. 어려운 법률용어며 복잡한 시사용어가 잔뜩 담겼다. 결론은 특정세력이 절대적으로 잘못이라는 것. 올바른 지향점은 악에 맞서 정의로운 행동을 하라는 것이거나 이를 지지하라는 내용이다. 강경하면서도 어렵고 엄숙한 투로 이와 같은 메시지를 담는다. 대학생들이 흔히들 접하는 운동권식 대자보의 유형이다.

고려대 대자보는 이러한 전형과 달랐다. 그랬기에 읽힐 수 있었고 사람들 기억에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같은 소재를 다룬 운동권 단체들의 성명과 고려대 대자보의 내용을 비교해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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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단체의 철도노조 지지성명과 고려대 대자보의 텍스트 비교 고려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와 같은 소재를 다룬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노동자연대 다함께>, <전국학생행진>의 성명을 비교했다. 운동권 단체들은 엄숙주의, 투쟁주의, 집단주의로 소통의 주체여야 할 학생들을 소외시킬 우려가 컸다. ⓒ 금준경


글에 핵심과도 같은 결론부를 비교해 보자. 현안에 대해 침묵하지 말자는 내용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이를 전개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서울대련>, <노동자연대다함께>, <전국학생행진>의 가치판단은 절대적이다. 불의가 있고, 이에 맞서는 일이 옳고, 이에 맞서는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대 대자보는 현 상황이 문제고 묵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언급하지만 직접적인 행동이나 의사표현을 강요하는 듯한 내용은 없다. 침묵이 문제라는 표현을 쓸 때는 '혹', '만일' 등 조심스런 표현을 함께 쓴다.

표현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울대련>은 박근혜 정부를 향해 '관권부정선거', '유신시대', '반민주일방통행'과 같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어휘를 쓴다. 철도민영화 지지에 대한 여론을 '절대적 국민여론'이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진보적 학생들에게는 공감을 얻을지언정 '리버럴'을 포함한 일반 청년들에게 어필하기에 효과적인 표현은 아니다. <노동자연대 다함께>는 한발 더 나아가 박근혜 정부의 민영화 시도를 "모두의 목숨과 공공서비스를 볼모로 미친 질주를 시작하려는 것"이라는 격정적 어투로 표현한다. <전국학생행진> 또한 "시민들의 미래를 볼모로 삼는 철도민영화 시도"나 "강고한 투쟁을 만들자!"와 같은 노골적인 표현 일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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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시위대 이른바 고려대 대자보를 계기로 모인 이날 시위대는 기존 운동권 단체의 집방식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자신이 준비해온 종이에 자신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적는 것은 이번 집회가 집단이 아닌 개개인이 주체임을 드러낸다. ⓒ 금준경


가장 큰 문제는 청년을 이야기하지만 청년과는 이야기하지 않는 운동권식 소통의 한계에 있다. 운동권 대자보는 이미 답이 정해진 일을 당사자들에게 통보할 뿐이다. 이는 대자보를 읽는 당사자로 하여금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게 한다는 불만과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반면 고려대 대자보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청년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글이다. 이는 청년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소통이다.

정파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동시에 피드백이 가능한 꽉 막히지 않은 소통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폭발적인 반향을 이끈 원동력이 있다. 이는 대자보를 쓴 당사자가 청년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으며 특정 정파나 단체에 무조건적인 동조를 하지 않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달리말해, 고려대 대자보가 운동권에 국한되지 않고 큰 반향을 만들어낸 비결은 '공급자 중심'이 아닌 '수용자 중심'의 사고로 글을 담은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실제 대자보를 쓴 주현우씨는 인터넷 언론 <ㅍㅍㅅㅅ>와 했던 인터뷰에서 "요즘 청년들이 패기 없고 실천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놀기 바쁘고 고생 안 하려 한단다. 이건 좌도, 우도 없다. 어느 쪽에서든 청년이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방탕하다고 본다"며 청년과 진보를 동일시하는 운동권식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를 지녔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청년진보 혁신의 계기로 삼길

이석기 사태 후 진보정당 재구성 논의가 쟁점화된 적 있다. 낡은 진보를 혁파하고 보다 대중적인 진보로 혁신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대학생 운동권 단체인 <한대련>은 통합진보당 당원들로 구성됐고 당과 운명을 같이 해왔다. 기성 진보의 시각을 청년으로 옮기면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 진보 역시 재구성해야 할 대상이다. 그 재구성의 중심에 고대 대자보와 같은 대중적 사고가 필요하다.

물론, 운동권의 공을 폄하하거나 반운동권 정서에 기대려는 취지가 아니다. <조선일보>처럼 정당이나 단체에 소속된 학생들이 순수하지 않다는 논리를 펴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NL이라는 단일정파로 구성된 <한대련>의 한계가 분명하다. 특정 PD세력 역시 무장혁명론이나 지나친 계급투쟁에 매몰되기도 했다. 실제 이번 대자보가 게시되고 SNS를 비롯한 뉴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는 과정에서 운동권 단체들은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운동권의 중추를 자임하는 <한대련> 또한 다르지 않았다. 대자보를 퍼 나르고, 자신만의 대자보를 써서 고대 대자보에 응답하고, 서울시청과 서울역에서 뭉쳐 행동한 이들은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이었다. 이는 운동권 단체가 대표성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드러내는 반증이다.

사실 오늘날 고려대 대자보가 일으킨 반향처럼 운동권 단체와 평범한 대학생들이 한데 어울려 행동한 적이 있었다. <한대련>이 지금과 달리 비운동권 학생회와의 가입과 연대가 이뤄졌던 2008년 촛불집회 직후다. 당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필자는 단과대 학생회 일을 했는데, 이때 <한대련>과 연대한 적 있다.

그러나 그 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생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보다는 집회에 '동원'하는 수단이자 숫자로 여긴다는 생각이 든 이유에서다. 내부의 이견을 조율하며 다양성을 보장하기 보다는 일방적 집단주의가 지나쳤다. 특정 정당에 종속된 사고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21세기 대학생연합이 아닌 20세기 자주파연합이었다.

지금, 운동권이 아닌 청년들이 고려대 대자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이 힘과 함께하고 싶은 운동권 단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특정 정파에 함몰된 단체가 '안녕들 하십니까' 대학생들을 함부로 이끌려했다간 과거처럼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운동권 단체들이 대중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다시금 고민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고려대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 #철도노조 #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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