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생들을왕리 펜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문세경
드디어 전국 각지에 사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40대 중반에 모처럼 지루한 일상을 떠나 인천 앞바다에 모일 수 있다는 건 운일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바빠 하루하루를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살아왔다. 이 하루의 '일탈' 쯤은 얼마든지 용서받아야 한다.
인천에 사는 한 녀석은 해물을 한 자루 꽉 채워서 등장했고 다른 녀석은 1++ 한우 등심을 가져와서 무한정 구웠다. 한 친구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음식 중에서 떡볶이를 제일 좋아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떡볶이 재료를 사왔고, 직업군인 녀석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에게 비싼 양주를 들이밀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사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카톡이 왔다.
"혹시, 오늘 범국민 시국대회에 갔어요?"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선배다.
"아뇨,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송년회 하느라 인천 을왕리에 있는데요. 왜요?""오늘 그 집회에서 행진을 하는데 물대포를 쏘고 난리가 났다고 하네요. 혹시 가셨으면 몸조심하라고 카톡했어요."너무 미안했다. 지금 시국이 말이 아닌데, 머릿수라도 채우러 가야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한가하게 먹고 놀기나 하다니, 좌불안석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내 심정을 알기나 할까? 슬쩍 얘기를 꺼내볼까? 몇분을 망설이다 끝내 말하지 못했다. 내 마음은 집회 현장에 가 있었고, 친구들의 대화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 한 켠에서는 삐딱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 봤다고 서로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연 30년이란 '세월의 골'이 메워질 수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대표격인 친구가 술이 더 취하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며 일어났다.
"얘들아, 우리 친구 중 한 명이 이번에 <한국산문>이라는 잡지에 수필로 등단을 했단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가 이번 송년회에 오지 못한다면서 나한테 책을 보냈어. 자, 다들 받으렴." 아뿔싸! 내가 주문한 <작은책>을 주려나보다, 내심 으쓱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문으로 등단한 친구의 책이라고? 김이 좀 샜다. 이어지는 친구의 말.
"깜박 잊을 뻔 했는데, 세경이도 너희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면서 이 책을 보냈어. 이 책에는 세경이 글이 없단다." <작은책>이 초라해 보였다. 쪽팔렸다. 하필 이럴 때 등단한 친구는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작은책> 이번 호에 글 하나 보낼 걸 그랬다는 뒤늦은 아쉬움이 몰려왔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 붉어진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술은 웬만큼 마셨으니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대세다. 한밤중에 12인승 승합차를 타고 우르르 노래방으로 몰려가는 친구들, 어릴 때 시골에서 덜컹거리는 경운기 타고 꼴 베러 가는 아이들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