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하지 못하다고? '안녕'하기 위한 그들의 정치

[주장] 대자보 한 장이 일으킨 좋은 기회 놓치지 말길

등록 2013.12.17 10:47수정 2013.12.1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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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십니까? 발길 멈추게 하는 대자보 주현우씨(고대 경영학과)가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학내 게시판에 붙여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13일 오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학우들의 연이은 지지하는 대자보들이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유성호


고려대 주현우 학생이 코레일 파업 참가자 직위 해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등을 규탄하며 학내에 붙인 '안녕들하십니까' 자보가 전국 대학가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각자의 자보를 공개하고 의견을 나누는 공간인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는 '좋아요'를 클릭한 인원이 21만 명을 넘었다.

선거 때마다 저조한 투표율을 보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고 생각되던 20대들을 대자보 한 장이 세간의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깃거리는 30년 전 대학생들이 외치던 숭고함과는 거리가 있다. 30년 전 대학생에게 정치적 민주화라는 절대적인 성전에 뛰어들었다면 지금의 대학생들은 내가 먹고 살기에도 벅차다. '우리들의 성전'은 죽은 지 오래고 '나만의 투쟁'으로도 벅찬 지금을 살고 있다.

30년 전 대학생과 2013년의 대학생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를 가로지르는 최우선의 화두는 정치적 민주화였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대학생은 민주주의의 투사이자, 보급자였다. 이렇게 재단된 대학생의 모습에서 대중들은 진취성과 진보성을 인지해왔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고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대학생들이 중요시 여기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그 호소력을 잃었고 이후 대학생들의 정치적 역할과 색깔은 흐릿해지게 되었다. 절대적 숭고함이었던 민주주의가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하자 대학생들은 정치적으로 갈 곳을 잃게 된 것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초래 된 경제 위기는 대학생들에게 정치는 곧 민주주의라는 공식의 파괴를 가속화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대학가의 절대 과제였던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점인 데다가 당장 나의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체제에 부딪히면서, 정치는 민주주의라는 숭고한 공식은 더 이상 대학생들에게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쳐대며 내일을 위했던 거리의 문구는 등록금 인하,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오늘을 걱정하는 문구로 변모했다. 이들의 외침은 이전처럼 숭고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와닿고 공감됐다.

본질적으로 정치는 부와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최대 다수의 이익을 공정하게 보장하는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채택되었다. 지난 수십 년간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이제 정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된 권리이다. 정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당장 내 옆의 현실이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에 숭고하진 못하지만 절실한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정치는 더 이상 경외감을 갖거나 두려워할 엄숙한 목적이 아닌 평범한 삶의 일부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거리에 나서는 것도 정치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또한 정치이다.

더 이상 대학생들은 대중들이 경외했던 숭고한 정치적 투사이자 고귀한 민주주의의 보급자일 필요가 없다. 나를 위한 작은 관심이 우리를 위한 큰 목소리로 바뀔 수 있다. 아직 우리는 대자보 한 장으로 작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를 향한 언론의 반짝 관심 때문이 아닌, 진심으로 '안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치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대학생들이 대자보 한 장이 일으킨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정치 #안녕들하십니까 #민주주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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