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드로잉 북의 당신들에게

등록 2013.12.21 17:46수정 2013.12.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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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파트촌인 수원시 영통지구와 한국 스타벅스의 나이는 비슷하다.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은 1기 신도시 붐의 약 5년 뒤인 1997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다. 1999년, 이화여대에서 한국 스타벅스 1호점이 개점했다. 나도 그때쯤 처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시멘트 숲이라면서 아파트라는 라이프 스타일을 욕하지만, 나는 깔끔하게 포개진 무수한 방들과 게임 <심시티>처럼 잘 정돈된 공원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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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경희대 앞 할리스 커피에서 ⓒ 이종완


50년 가까이 된 허름한 주택에서 시궁창 쥐와 함께 살던 나에게 이 신도시는 새로운 자연이자 삶이었다. 똑같아 보이는 아파트와 아프리카 국경처럼 계획된 도로마저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처럼 나에게 특정한 기억을 환기해준다. 내가 앉아 있는 스타벅스 창문 너머 샴푸 나이트클럽이라는 촌스러운 네온사인이 반짝거린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저 나이트클럽도 몇 번이나 닫고 또 재개장했다. 돔구장처럼 천장이 열린다는 말에 고등학생이던 나는 어른이 되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났다. 지루해 보이는 낡은 신도시는 가족과 친구와 함께 그 공간을 걸었음으로써, 그 공간만의 향기를 갖게 되었다. 하드코어 술래잡기를 하던 영덕중학교 놀이터, 지금은 예식장이지만 첫 여자친구와 <슈렉2>를 봤던 키넥스 5 극장, 군대 가기 직전 가족과 고기를 먹었던 화사랑 화로구이는 나만 아는 사소한 역사다.

나는 내가 사는 거대한 상자들처럼 스타벅스라는 인공적인 자연을 좋아한다. 원목무늬의 테이블과 연한 오렌지색의 조명은 어떤 스타벅스든 똑같아서, 외딴 도시의 스타벅스에서 가더라도 친숙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아네모네, 델페니움, 블루벨과 같은 꽃 이름처럼 돌체라떼, 베리베리 히비스키스, 망고 패션 후르츠 블렌디드 주스 따위의 어려운 이름을 자연스럽게 외운다. 스타벅스 또한 내가 사는 아파트들처럼 하나의 생태가 되었다.

새집증후군을 의심할 만큼 페인트 냄새가 심하게 나던 이 스타벅스도 꽤 올 만한 장소가 되었다. 젊은 신혼부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통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것은 뜻밖에 늦은 2012년이었다. 이 질리는 아파트촌과 스타벅스는 잘 어울린다. 똑같은 나무 재질의 프레임으로 둘러싼 인테리어, 카운터 옆의 비싼 스타벅스 한정판 텀블러들, 공정무역 커피라고 주장하는(슬라보예 지젝이 비웃을) 아프리카의 마을과 원두 사진들로 한 벽을 채우고 있다.

이 인테리어는 항상 투 샷이 들어가는 스타벅스의 아메리카노 맛처럼 부산 광안리든 제주 서귀포든 항상 똑같다. 심지어는 재즈 음악까지도. 하지만 그 똑같은 공간을 채우는 사람만큼은 항상 다르다. 종종 나는 벽 쪽 자리에 붙어서, 스타벅스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그들의 얼굴을 그린다. 가끔은 드로잉 북에 그리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경우가 생기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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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영통 스타벅스에서 ⓒ 이종완


각자 일행과의 대화나 스마트폰의 카카오톡 메시지, 아이패드의 사파리 창, 랩톱의 엑셀문서, 소설책에 정신이 팔려있다. 옆에 있는 통통한 중학생 소녀는 숏 사이즈의 음료를 하나도 마시지 않고, 개념원리 수학 문제집을 푸는 데 여념이다. 전부 개방된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철저하게 폐쇄적이다. 그들에게도 아파트처럼 보이지 않는 방이 있다. 내게 그들은 스케치북의 네모난 프레임 속에 갇혀있다.

내 드로잉 북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낯선 사람들을 바라본다. 몇 년 동안 카페에서 그렸던 사람 중, 일행과 대화하는 경우 이외에 웃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웃음이라는 행위는 보통 사람과의 의사소통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발화이다. 혼자 있는 사람은 잘 웃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사람들의 새하얀 표정은 혼자 있는 내 표정이 아닐까. 가끔은 드로잉 북의 그들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궁금하다.

내 드로잉 속의 그들이 단순한 군중이나, 스타벅스의 소비자로 남는 것이 싫다. 손의 압력에 의해 생기는 연필 선과 같은 물리적인 그들의 흔적이 아니라, 그 여백에 그들에 대한 짤막한 기억이라도 채워지면 좋겠다.
#수원 #영통 #드로잉 #드로잉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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