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불을 훔친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표지
서해문집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줬다. 그 일로 제우스는 크게 노했고,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렸다. 바위에 매달아두고 독수리가 간을 쪼게 했다. 상처는 다음날 곧바로 아물고 다시 생살을 파고드는 고통은 계속됐다. 그리스 신화를 풀어놓은 설에 따라 세부적인 해석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사건은 그렇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아주 끔찍한 일을 했다고 믿었어. 신들에게서 비밀을 훔쳤지. 신들의 법을 어긴 거야. 그 벌로 신의 왕인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산꼭대기에 사슬로 묶고 매일 같은 벌을 내렸어. 영원히, 하루도 빼지 않고.""끔찍한 벌이군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 벌을?""준비되지도 않은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을 준거야. 불 피우는 법을 알려줬지." - <트리니티> 첫 장면에서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운전병의 대화
원자폭탄 제조를 총괄하던 오펜하이머는 왜 저런 말을 했을까. 원자력과 '신의 불'은 무슨 관계인 걸까.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러나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인류가 감당키 어려운 거대한 봉인이 해제될지도 모른다는.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건넸을 때처럼 말이다.
원자폭탄 만든 사람들... 그들은 몰랐다인류가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한 때는 2차 세계 대전의 끄트머리다. 히틀러도 죽고 나치도 사라졌지만, 일본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태세를 보였다. 전쟁을 끌고 가려면 미국 역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그 모든 복잡한 계산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꽤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인과 결과만 알 뿐이다. '과정'을 생략한 채 말이다.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 암호명과 똑같은 이름으로 출판된 <트리니티>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역사적 사실들은 물론이고, 과학적 과정에 대해 상세하고 정교한 묘사를 했단 점이다.
원자력의 원리, 당시의 정세, 진행 과정, 과학자들의 고뇌를 고스란히 담았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 투하' 사이의 징검다리가 '맨해튼 프로젝트'다. 13만 명이 참여하고 20억 달러가 들어간 거대 공학 프로젝트다. 진행중에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참여한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하는 일의 궁극적 목표가 뭔지 몰랐다.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 당대 최고의 두뇌들이 모두 투입됐다.
3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지막 실험이 진행됐다. 쾅. 그라운드 제로라 불리는 원자폭탄 실험장에서 대기를 휘저으며 피어오르는 구체 구름이 보였다. 오펜하이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저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 되었노라. 세상의 파괴자가!" - <트리니티> 83쪽과학자들은 두려웠다. 자신들이 만든 원자폭탄이 쓰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원자폭탄은 완성되는 순간, 그들의 손을 떠났다. 과학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봉인은 너무나 간단히 해제됐다. 트루먼은 포츠담회담에서 일정이 잠깐 비어 스탈린과 만났다. 그들은 단 두 마디를 나눴다. 트루먼이 "우리에게 초유의 파괴력을 지닌 무기가 있습니다만." 스탈린은 대답했다. "그 무기를 일본에 제대로 사용하길 바랍니다." 이 짧은 대화는 20세기에 독한 잔향을 남겼다.
두 가지 폭탄이 떨어졌다. 히로시마에 먼저 '리틀보이'가, 뒤이어 나가사키에는 '팻맨'이. '리틀보이'는 총의 원리를 응용해 폭발하도록 만들었다. 갸름한 형태라서 '리틀'이다. '팻맨'은 플루토늄을 폭발물로 둘러싸 연쇄적으로 폭발하도록 했다. 둘러싼 부분이 볼록해서 '팻'이다. 귀여운 이름이지만 위력은 정반대다.
원자력이 폭발하면 열기와 빛이 먼저 조용히 도달한다. 고요한 세상에서 공기의 파도가 시속 1300km의 속력으로 사방에서 몰아친다. 소리는 다음이다. 불타오르는 대기가 지축을 뒤흔들며 포효한다. 투하 지점을 중심으로 수백m 이내에 존재하는 모든 발화 물질은 한 줄기 연기로 바뀐다. 기압이 치솟아 사람들의 눈과 폐가 부풀어 터져버리고 고막은 찢어진다. 사막만 남는다.
원자폭탄이 쓸어버린 것은 사람이다. 천진난만하게 장난치던 두 소년일수도 있고, 밥상을 앞에 두고 마주한 가족일 수도 있다. 그렇게 히로시마에서 7만 명, 나가사키에서 2만 명이 사라졌다. 그 두 배의 인원이 부상을 당했다.
끝이 아니다. 폭발은 순간이지만, 피폭의 고통은 계속된다.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다. 메스꺼움과 두통으로 시작해 끝끝내 목숨을 잃는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감마선이 우리의 세포를 뚫고 지난다. 이때, 세포 안의 DNA가 영향을 받게 되며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손에서 시작된 결과물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 참혹한 피폭자들과 황량한 도시만이 그들을 반겼다. 과학의 발전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그들이 결코 해본 적 없을 질문이 입에서 새나왔다.
"해도 되는 일일까?"
개발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갈등을 겪었다. 단순노동을 했던 이들은 그나마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몰랐으니까. 그러나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 아는 사람들일수록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공적인 연설에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든 것은 가장 끔찍한 무기입니다. 그 때문에 세상의 원칙이 갑작스럽고 심각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물건은, 우리가 사는 세상 어떤 잣대에 비추어 봐도, 사악한 물건입니다. 이런 물건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과학이 과연 사람에게 이로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또다시 불러일으켰습니다." - <트리니티> 마지막 장면에서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린 원자력으로부터 안전한 걸까. 핵무기를 쓰지만 않으면 무사한 걸까. 아니다. 간과하고 있지만, 사실 세계 도처에 폭탄이 있다. 그리고 수시로 폭발했다. 꼭 폭탄이란 이름을 가지고 터져야지만 폭발이 아니다. 모두 끔찍한 결과를 동반했다. 영국에서, 미국에서, 체르노빌에서, 최근에는 일본 후쿠시마에서도.
생각해볼 일이다. 정말 해도 되는 일일까?
트리니티 - 신의 불을 훔친 인류 최초의 핵실험
조너선 페터봄 지음, 이상국 옮김,
서해문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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