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아버지 전상서'에도 안 지는 이 소설, 뭔가요

[분석] <중앙일보> 소설칼럼 '김정은의 신년 독백'을 읽고

등록 2014.01.03 18:39수정 2014.01.0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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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다. 이젠 남조선 노래 '서른 즈음에'를 부를 수 있는 나이다.'

소설의 한 구절처럼 보인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주인공의 나이가 갓 30대였다면 대사가 될 법도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영종 <중앙일보> 정치국제부문 차장이 3일자 <중앙일보> 26면에 [노트북을 열며]라는 코너에 쓴 글이다.

<동아일보>의 '소설칼럼'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조선일보>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보도가 나간 이후, 지난 9월 17일 <동아일보>는 '채동욱 아버지 전 상서'라는 칼럼을 실었다. 칼럼이 실렸을 당시 아직 채 전 총장의 혼외아들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없는 상태였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기자가 칼럼으로 소설을 쓴다"며 비판했다. 아동인권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은 비판 성명까지 발표한 바 있다.

멀지 않은 과거에 벌어졌던 '소설칼럼'이, 갑오년 벽두부터 등장한 것이다. 이번에는 스케일을 더 키워 김정은 국방위원장에 빙의 해 쓴 칼럼이었다. 어떤 내용과 의미인지 한번 이 글을 쓴 기자의 입장에 빙의해 분석해봤다.

이 차장의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른 살이다. 이젠 남조선 노래 '서른 즈음에'를 부를 수 있는 나이다. 애연가인 나로선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이란 대목이 제일 좋다. 사실 요즘 담배가 많이 늘었다. 며칠 전 마식령스키장 리프트에서도 줄담배를 피웠다. 고모부 장성택 때문이다. 후계자 시절부터 건성건성 대하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눈에 거슬리긴 했다. 그래도 처형까지 한 건 좀 심했다며 꿈결에 나타나는 바람에 자꾸 밤잠을 설친다. 젊은 시절 그와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눴던 경희 고모. 황혼에 나이 어린 조카 때문에 과부가 돼버린 그녀의 두문불출도 부담스럽다."

12월 28일 JTBC에서 방영됐던 '히든싱어' 고 김광석 편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남한의 문물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기기도 하다. 마식령스키장에서 일거수일투족과 최근 장성택 사형 이후 심경, 고모에 대한 애환과 염려는 마치 본인이 쓴 것 처럼 섬세한 감정을 담아냈다.


"그런데 정말 잘한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통치 노하우 제1장은 '장성택 제대로 다루기'였다는 점이다. 적당히 먹고살게 해주되 2인자라며 기어오르려 하면 혼쭐을 내주란 얘기였다. 때론 고모인 김경희 비서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다. 아버지는 나의 '장성택 사형'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지, 저승에서 나에 대해 어떤 뒷담화를 매제 장성택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하다. 할아버지 김일성 수령이 뭐라 뭐라 나를 나무라지나 않을지도 걱정이다."

아버지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아버지인 김정일과 할아버지 김일성이 저승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 할지도 걱정하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우듯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주인공의 심경 묘사에 탁월한 기법이라 하지 않았던가.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2014년 새해가 밝았다. 집권 3년차다. 처음엔 서울과 서방 언론은 나를 '미숙하고 어린 지도자'라고 얕봤다. 그렇지만 이설주라는 예쁜 부인도 있고 딸 둘을 둔 아빠라는 사실에 날 좀 어른스럽게 대해줬다. 장성택까지 치고 나니 "깔봤다간 큰일날 인물"이란 말도 나온다. 좀 마음이 놓인다."

클린턴 부부의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 당시 한 주유소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당신, 나 안 만났으면 저런 남자와 결혼했을걸"이라 말한다. 힐러리는 "만약 내가 저 주유소에서 기름이나 넣어주는 남자와 결혼했다면 이미 그 남자는 지금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을걸요"라고 답한다. 이 대목은 김정은의 방만함을 비판하는 대목임과 동시에 이설주에 대한 오마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엔 분위기를 확 바꿔야겠다. 우선 신년사에 '북남 관계개선'을 슬쩍 띄워봤다. "북의 지도자가 대화용의를 표명했다며 기대하는 눈치"라고 김양건 비서가 남쪽 분위기를 귀띔해준다. 일단 성공이다. 그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지난해 4월 개성공단 문을 닫아걸던 때와 같은 패착은 금물이다. 입주기업과 국민여론에 떠밀려 '제발 공단을 열어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깐깐하게 나오는 바람에 골치 아팠다. 베테랑 대남일꾼인 양건 비서도 그런 오산을 하다니, 아버지가 왜 개성공단만은 손대지 않았는지 계산했어야 한다."

인테리어 바꾸듯 외교정세를 '확 바꿔야겠다'는 단호한 표현도 잊지 않는다. 남·북을 '북남'으로 바꾸는 디테일한 센스가 돋보인다. 개성공단 위기 상황 당시 북한의 대응이 어설펐다고 역설하는 부분도 잊지 않는다.

"비난을 일삼다 갑작스레 당국대화를 제안하면 낯뜨거울 수 있다. 작년 9월 미뤄놨던 '추석 상봉'을 써먹어 볼까 생각 중이다. 이달 말 설 명절 계기 이산상봉으로 슬쩍 포장만 바꾸면 될 테니까. 그런데 박근혜의 생각과 예상 반응이 궁금하다. 오늘밤엔 2005년 평양을 방문했던 박근혜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 녹취록이나 들춰봐야겠다. 그때 배석한 장성택은 또 뭔 얘기를 했을까 궁금하다."

소설칼럼은 김 국방위원장의 다음 수를 예측하는 장면과 속내를 적절히 묘사한다. 평양을 방문했던 박근혜 현 대통령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으로 장성택을 언급한 이유는 김 위원장의 '읍참마속'을 부각시키는 장치가 아닐까?
#중앙일보 #칼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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