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의 '교학사 구하기'...'흑역사'가 또 있다

[주장] 교육부의 '폭주'를 어떻게 막아야 하나

등록 2014.01.09 18:24수정 2014.01.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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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 철회에 '외압'이 있었단다. 애초 채택했다가 철회한 학교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조사' 결과 그렇게 나왔다면서 교육부 차관이 한 얘기다. '외압'을 받은 학교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추가 논란을 우려해서라고 한다. 밝히지 못할 무슨 구린 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추가 논란 우려'라는 말의 진정성을 일단 믿어 보자.

그렇지만 '외압'은 절대 믿지 못하겠다. 인정도 못 하겠다. 외압의 실체로 지목한 대상도 그냥 '시민·교직단체'다. 교육부는 이들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는 걸까. 문제의 학교들이 그들의 압력을 진짜 '외압'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들 시민·교직단체가 내세운 항의나 비판이 정당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들의 '압력'이 있긴 했으나 그 '압력'보다는 학교 자체의 독자적인 입장이 더 크게 작용해서 그런 건 아닐까.

이든 저든 '외압'을 말하기에는 교육부의 논리가 너무 궁색해 보인다. 시민·교직단체가 문제투성이의 교과서를 선정한 학교를 멀뚱히 바라만 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 단체들의 규모나 영향력이 어떻든지 간에 말이다. 그것이 다른 교과서도 아닌 역사교과서임에랴.

더 큰 문제는 교육부의 위선적인 태도다. '외압'으로 보기 힘든 것을 '외압'이라고 강변하면서 학교 현장에 진짜 '외압'을 행사하려 드는 교육부의 행태를 질책하는 이들이 많다. 더 많은 이들이 애초 채택 과정의 '외압'은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교육부의 '이중잣대'를 비판한다. 나는 교육부가 이들의 질책과 비판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별로 커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왜 그런가. 교육부의 '흑역사' 때문이다.

2008년, '제1차 역사전쟁' 때... '좌파 교과서' 논란에 휩싸였다

2008년, 이른바 '제1차 역사전쟁' 때의 일이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가 대표 필자로 집필한 금성출판사 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금성 교과서)가 '좌파 교과서' 논란에 휩싸였다. 보수 진영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마지막 결정적인 타격은 당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주도했다. 교과부는 당시 교과서 교체 압력의 화끈한 길라잡이였다.

2008년 9월 8일 열린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끝난 뒤, 서울시교육청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6종을 비교·분석하는 자료를 만들어 학교장과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 위원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서울시교육청은, 훗날 선거법 위반으로 교육감직을 상실하고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공정택 교육감이 이끌고 있었다.


서울시교육청의 발표 이후, 교과부는 학교장과 학운위 위원을 대상으로 한 연수자료를 제작했다. 교과부 국장이 연수 강사로 참여하여 교장이 교과서를 소신 있게 채택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소신 있는 채택' 운운했지만, 사실상 금성 교과서 채택을 철회하고 다른 교과서를 선정하라는 압력이었다. 교과부는 그런 식으로 서울시교육청이 주도한 금성 교과서 교체작업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했다.

그뒤 금성 교과서 교체를 위한 연수나 행정지시는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강원도, 부산광역시, 경기도, 충청남도 등에서까지 금성 교과서 교체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이때에도 교과부는 교과서 주문 시한을 연장하면서까지 교과서 교체작업을 지원해 주었다. 원칙과 절차, 규정을 강조하는 교과부의 모습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교과부의 뜨거운 지도 결과 금성 교과서를 사용하던 700여 개 학교 중 339개교가 교과서를 변경했다. 금성 교과서를 사용하는 학생 수도 54.4%에서 32.3%로 20%나 줄어들었다. 전체 과반을 점유하던 비율이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급락한 것이다. 교과부와 교육청이라는 진정한 '외압'의 결과는 이토록 막강했다.

당시 보수 진영은 6종이나 되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중에서 이른바 '좌파 교과서'인 금성 교과서가 과반의 채택률을 갖게 된 것이 전교조의 조직적인 개입에 따른 결과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 인터넷 언론은 교사들의 전교조 가입과 금성 교과서 채택 사이의 상관 관계를 확인하는 기상천외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전교조 가입률이 가장 높았던 광주광역시에서는 금성 교과서 채택률이 낮은 반면, 전교조 가입률이 낮은 대전광역시에서는 금성 교과서 채택률이 높았다. 웃어 넘기고만 말기에는 너무나도 스산한 한 시절의 풍경이다.

이번에도 어김 없이 '전교조의 테러'니 하는 말이 나왔다. 진정한 '외압'의 주체인 교육부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하기 위해 엉뚱한 곳에 화살을 날리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시민·교직단체의 외압을 들먹인 특별조사 결과 발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교육부 나승일 차관은 이번 특별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교과서 채택의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근본적으로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단위학교의 자율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교육부의 말이 공허하게만 들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교육부의 말에서 그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의 취지와 의미를 가장 앞장서서 훼손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교과서 채택의 자율성 강조는 교육의 자주성을 위한 것이건만, 교육부의 말은 학교장이나 이사장의 자율성을 살려 주겠다는 것으로만 다가온다.

나는 지금 교육부가 '외압의 추억'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예의 '외압의 흑역사'가 불과 6년 전에 있었기에 말이다. 정권의 색깔도 여전하니 '추억'으로 그리워하기만 할 필요도 없다. 교육부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당한 '외압'을 행사할지 모르겠다는 얘기다. '외압'을 제도화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담론도 점점 커져만 간다. '폭주'하는 교육부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교육부 #교학사 교과서 #교과서 채택 철회 #외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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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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