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헌장.
역사문제연구소 제공
그 분의 '어록'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다. 당시로선 누구나 당연시했기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라 적잖이 놀랐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했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방과 후 집에 달려가 '저 선생님 혹시 간첩일지도 모른다'며,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신고(?)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공방첩'과 '멸공통일'이라는 글귀가 전봇대와 담벼락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왜 교과서 맨 앞에 태극기와 국기에 대한 맹세,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이 적혀 있어야 할까? 혹시 그 글귀를 외우며, 속뜻을 찬찬히 음미해본 적 있니? 혹시 너희들 중 그것들이 언제, 왜 제정되었는지 아는 사람 있니?"명색이 고등학생이었지만 그때까지 그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태극기는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될 성스러운 것이었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은 수시로 외우면서 우리 국민들의 국적을 증명하는 절차 같은 것이었다. 교과서는 흑백에다 누런 갱지였지만, 태극기와 맹세,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이 적힌 종이는 희고 빳빳한 컬러판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심을 해보라니. 순간 깜짝 놀랄 만큼 '불경스러운' 말이었지만, 그것은 미래 나의 전공과 직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님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고, 또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역사 공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험 성적은 변변치 않았지만, 자문자답해가는 과정이 마냥 신이 났고, 끔찍히도 싫어했던 연도를 외우는 것조차 즐거웠다. 무기력했던 학교생활이 활기차게 변한 건 덤이었다.
그 분은 그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왜 그랬는지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철밥통' 교사도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가르치거나 그것에 의심을 가지면 무사하지 못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교사는 국가가 정해준 내용과 절차를 따라 한 치의 벗어남 없이 가르쳐야 하며, 그 공통된 '매뉴얼'이 바로 교과서였던 거다. 물론,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여기서 국가란 정권과 동의어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 그것도 한국사 교사가 된 지금, 나 역시 그분이 던졌던 질문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할 순 없다. 태극기 그림은 삭제됐고, 국기에 대한 맹세는 그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국민교육헌장은 아예 자취를 감춰 내용은커녕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학창시절 십 수년 간 매 맞아가며 외운 터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그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교훈은 남았다. 교과서의 역사 서술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그것이야말로, 저 유명한 역사학자 카(E. H. Carr)가 설파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또, 그것은 '국사는 암기과목이 아니'라는 선생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이며, 교사가 된 지금 매 수업시간 교단에 오르기 전 무슨 주술외듯 잊지 않고 되뇌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교육부 국정교과서 회귀... 역사가 두렵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