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누가 감히 나를 막을 것인가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12] 심문(1)

등록 2014.02.03 10:54수정 2014.02.0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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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황인규

무영객은 느티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급할 건 없다.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 어떠한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냉정하게 목표물에 집중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그것이 살수(殺手)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살수는 실패한다. 살수에게 있어서 실패란 곧 죽음이다. 자신이 여태 살아 있음은 이러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뱀처럼 조용하고, 매처럼 쏜살같고, 두꺼비처럼 기다려야 한다.

수감항아(誰敢抗我)! 누가 감히 나를 막을 것인가.


스승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면 이렇게 중얼거리라고 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라고 했다. 스승? 그 자를 과연 나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가? 스승이라는 말이 가르치는 자에 한정한다면 그는 나에게 있어 스승이 맞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가르침 받는 자로부터 우러름을 받아야 하는 자라면 그는 스승이 아니다. 아니 나의 원수다.

무영객은 일운상인 모충연이 맘에 들었다. 그는 강직했다. 적어도 야비하진 않았다. 목숨 앞에서 당당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에게 스승이라 불리운 자와 일맥상통했다. 스승이라 불리운 자 역시 목숨을 구걸하진 않았다. 자, 베어라. 다른 칼이 아닌, 적어도 내가 가르친 자에게 칼을 맞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다른 칼을 맞고 쓰러지리라 예감했다. 그런데 너의 칼을 받고 나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너나 나나 살수의 길에 들어선 이상, 손속에 정을 두지 마라. 그것이 살수의 최후에게 베푸는 마지막 예(禮)다.

살수는 정해진 길이 없다. 암습이든 교란이든 겁박이든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렇다고 크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살수는 상황을 통제하거나 상황에 지배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결과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순간의 판단이 너의 생사와 직결된다. 검(劍)은 그저 상황의 결과일 뿐이다. 검에 의존하지 마라. 그건 검에 권위를 두고 검으로 권력을 취하고 있는 소위 정통 문파들이나 하는 짓이다. 검은 마지막 순간에 휘두를 뿐이다. 그 휘두름 후에 네가 살아있다면 너는 일을 끝낸 것이고 네가 죽어 있다면 너는 살수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아울러 네 목숨도.

무영객은 소리없이 나무를 내려왔다. 비영문 사람들은 외부인들의 철수에 주목하느라 그가 허공에서 한 마리 새처럼 사뿐히 내려와 담장 뒤로 숨어버리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무사 둘과 서생 하나는 비영문의 정문 앞 공터에 대기 시켜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외양이다.

그러나 검은 휘장을 드리워 안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고, 콧김을 씽씽 불어대며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말에서 뭔가 위압적인 것을 느끼게 했다. 비영문은 저자거리의 외곽에 있어 금방 군중의 무리들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가 있다. 무영객은 재빨리 비영문의 이중 담을 넘어 뒤쪽 숲에 매어둔 말을 향해 달려갔다. 비영문에서 저자거리까지는 외길, 마차 속도라면 반각 정도 걸릴 것이고 그사이 비록 우회하기는 하지만 숲길의 소로로 말을 달리면 충분히 따라 잡을 것이다.


무영객은 경공을 늦추지 않고 달려온 탄력으로 능숙하게 말에 올라탄 다음 고삐를 풀고 달렸다. 그는 말 위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일을 하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나타났고, 또한 예기치 못하게 모충연이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노인네는 은퇴한 뒤 내공 수련을 전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와 같은 고수가 그 정도의 고문에 넋이 나가다니. 그래도 그 늙은이는 옛 강호 무인의 기개 하나만큼은 잃지 않았다.

무사 차림의 사내들은 은화사 소속이 틀림없다. 보통 사람들은 간파하기 힘들지만. 잘 훈련된 준마와 마차의 용골에 새긴 자작나무의 문양이 그들이 어디 소속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장기에 달린 은색 술이 그들의 정체를 확인해 주었다. 은화사 단원들이 공식적인 일로 소속을 밝힐 때는 병장기에 은색 술을 달게 돼 있다.


물론 잠행을 할 때는 아무런 표식이 없지만. 그런데 그들이 연행하는 서생 차림의 사내는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다. 그동안 살펴본 바에 의하면 비영문의 제자도 아니고, 의뢰인으로부터 그자에 관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 상황은 이런 식으로 엉뚱하게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다지 염려할 것은 못된다. 모든 상황은 통제하기 나름이니까.

그런데 은화사 요원들이 이토록 빨리 나타난 걸 보면 그들도 모충연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아니면 비영문 내부에 은화사에 내통하는 자가 있던가. 그들이 모충연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무엇 때문일까. 자신에게 일을 의뢰한 자와 같은 목적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가. 그는 지난 보름 동안 모충연의 거처와 동태를 살피는 과정에서 자신이 노출된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내렸다. 그의 잠행술은 강호의 어느 누구라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만약 일이 주어진다면 소림사 장문인의 주장자를 훔쳐 오라거나 심지어 황궁의 지엄하신 태후마마의 속곳을 빼내오라고 해도 자신이 있다. 적어도 잠행만이라면. 그렇다면 비영문 내부의 문제로 돌려야 한다. 그건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은화사라는 상당히 번거롭고 위험한 조직이 연루돼 있다는 것이 거슬릴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당황하는 것은 아니었다. 은화사 단원이 강호의 고수들로 구성돼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자기 혼자 그 둘을 처리하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출이 돼 있고 자신은 어둠 속에 있다. 이건 무공의 높낮이를 떠나 상황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하는 조건 속으로 그들을 떠미는 것이다. 그는 목표물을 앞에 두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고 보기로 했다.

아직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혹은 그들이 데리고 간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충연은 그 서생 차림의 사내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은화사 단원들이 비록 예전에 비해 위세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비영문의 장내를 그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다급하게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좋아, 이제 벗겨도 돼."

검은 자루가 벗겨지자 관조운은 숨을 한껏 들이켰다. 신선하다곤 할 수 없지만 충분한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자 살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돌로 쌓은 석실이다. 관조운의 양쪽 벽면에 화섭자가 불타고 있고 전면의 벽엔 아무것도 없고 후면의 벽엔 겨우 사람하나 드나들 만큼 작은 문이 있다.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들은 관조운에게 검은 자루를 씌웠다. 그리고 대략 반 시진 정도를 달렸다. 관조운은 마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 온 다음 계단을 내려 갈 때부터 지하인 줄 알았다. 그들은 어떤 방에 그를 데리고 가서는 의자에 앉혀 놓고 손을 뒤로 하여 밧줄로 묶어 놓고 나갔다. 그리고 한 시진은 족히 넘은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야 들어와 관조운의 자루를 벗기는 것 아닌가.

투박한 책상이 있고 맞은편엔 중년의 사내가 앉아 있다. 별 다른 특징이 있는 얼굴은 아니지만 누에처럼 짙고 두터운 눈썹만이 눈에 확 띄었다. 그 밑으로 약간 찢어진 듯한 눈과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형형했다. 상투를 묶은 끈은 검은 색이었고 암회색의 도포를 입었지만 어디에서도 무림인 특유의 허세가 없었다. 중년인의 뒤로 섬서괴도 척숭이 한 발 물러 서 있고, 곤륜흑우 사동화는 관조운의 뒤 문 앞에 서 있다.

"괜찮소, 관 소협? 이런 식으로 대접을 해서 미안하오. 다 사정이 있어 그런 거니 양해 바라오."

중년인은 은근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관조운은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강압적으로 그를 끌고 온 것도 심기가 편치 않은데, 이런 지하방에다 한 시진 이상을 묶어놓고는 이제 와서 양해를 바란다니.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은화사라지만 이런 식의 대우에도 그저 황감하며 고개를 숙이기에는 그의 기개가 너무 강했다.

"귀하는 누구시오?"

관조운은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예진충이오."

중년인은 짤막하게 답했다. 흔히 강호에서 통하는 외호도 소개하지 않았다. 예진충이라, 관조운이 아는 짧은 강호의 견식으로는 그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관조운이 무림에 정식으로 출사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무에서 문으로 방향을 바꿨으니 강호의 견식에 어두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연 장문인과 무림맹 사람들이 놀라던 섬서괴도와 곤륜흑우가 중년인의 지시를 받는 부하인 것으로 보아 그는 굉장한 고수일 것이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 미리 보는 다음회

예진충의 말투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그가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낡은 한지로 된 종이에서는 초서체로 쓰인 글씨가 언뜻 보였다.
“개진연형(開眞煉形) 형숙귀무(形熟歸無) 이 요결을 알고 있나?”
예진충이 문서를 보며 관조운에게 물었다. 말투는 어느새 하대조로 바뀌었다.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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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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