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특파원의 항의 전화... "너, 어떤 놈이야?"

[중국속에서 15년 ②] 밀레니엄 시대 전후의 중국

등록 2014.02.18 10:24수정 2014.02.2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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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개봉한 영화 <폭풍 속으로>는 당시 미남배우들의 향연이었다. 키아누 리브스, 패트릭 스웨이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후면에 도둑들의 부정적 이미지도 있지만, 시대에 대한 반항심을 파도를 향해 돌진하는 서퍼들로 형상화한 수작이었다. 나 역시 그 시간을 지배한 생각은 노마디즘(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이었다. 자크 아탈리의 교훈대로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으로 중국에 도전해야 했다.

2000년을 맞는 중국도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중국은 장쩌민과 주룽지의 시대를 앞둔 시기였고, 올림픽 개최·WTO 가입 등으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가는 원년에 가까웠다.

내 밀레니엄은 윈난 성 리지앙 고성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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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지진도 버텨낸 800년 역사의 리지앙 고성.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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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앙 고성은 밤이 되면 홍등이 걸리고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자신을 찾아가는 곳이다. ⓒ 조창완


내 새 밀레니엄은 윈난 성 리지앙 고성의 차가운 호텔 방에서 시작됐다. 방학이 시작되어 아내와 계획했던 여행을 시작했다. 중국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자고 생각한 대장정의 현장을 만나는 게 주 테마였던 여행이었다. 장정의 출발점인 루이진(瑞金), 징강산(井崗山)을 경유해 장정길의 중요한 거점인 진시강(金沙江) 도하지 중 하나인 스쿠진(石鼓鎭)을 향하던 길이었다.

그 길에 우리 부부는 윈난의 멋에 푹 빠졌다. 하지만 리지앙의 추운 호텔 방 때문에 나는 감기를 얻었다. 따리 얼하이 호수에서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고산은 온도가 낮지 않지만, 감기에 걸리면 혹독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감기는 구이양을 경유해 장정의 변곡점인 준이(遵義)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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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월 28일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주더가 만났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아나도 대장정 등 이후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 조창완


보름 여의 여행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징강산 기차역에서 징강산 내부로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만과 중국인 아저씨들과 나눈 대화였다. 그들은 땅의 보상이 어떻고, 방값이 어떻고 등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이야기를 했다. 마오쩌둥과 주더가 만나고 꿈을 키우면서 중국을 태동시켰던 혁명 성지와는 전혀 낯선 대화였지만, 나는 서서히 그것이 중국임을 알아가고 있었다.

내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만난 전경련 부회장인 김각중씨가 중국을 다녀오고 느낀 소회로 "중국은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나라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비로소 실감했다. 돈과 지식을 독으로 삼아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던 문화대혁명(1966~1976)이 마무리된 지 사반세기 만에 혁명의 성지마저 부자되기에 빠져드는 모습은 역시 상인종(商人種)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다.


2000년 설날이 지나지 않아 한국에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렸다. 2월 말 항저우에서 사업하던 한국인 사업가 송아무개씨가 중국 교포 직원에 의해 살해됐다. 이 즈음 비슷한 소식이 들리면서 한국에서는 중국 동포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했다. 1992년 수교 이후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나라의 중국 진출은 봇물이 터지고 있었다.

한국인의 빠른 중국 진출에는 우리말과 중국어를 같이 구사하는 교포들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중국 교포들은 어디에도 포지션하기에 너무 애매한 처지였다. 한중 수교 전 그들에게는 북한이 더 가까웠지만, 이제 한국과 접촉해야만 빨리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교포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교포들은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형국이었다. 그런 시간이 10년 가량 지나면서 갈등도 증폭되고,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그런 갈등은 즉자적인 사건들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지나치게 한국인의 관점만을 부각시켜, 중국 교포들은 사정을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중국서 언론인으로 생활하는 것은...

그 해 3월 나는 중국 현지에서 발행하는 한국신문(중국경제신문)의 편집국장을 맡게 되었다. 내가 신문을 책임지자마자 발행한 첫호의 톱 기사는 '한국 언론의 냄비근성'이었다. 중국 동포들과 한국 인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다루면서 경주마 쫓듯이 보도하는 한국 언론의 문제를 다루었다. 신문이 나가자마자 베이징에 주로 거주하던 한국 언론의 특파원의 대표 역할을 하던 방송사 특파원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야 너 어떤 놈이야. 니가 무슨 근거로 그런 기사를 쓰는 거야. 찌라시 같은 신문 주제에 우리를 비판해."

나는 차분히 대응했다.

"제 기사에 문제가 있습니까. 중국에 있으면서도 최근 사건들의 맥락을 짚어주지 못하니 저도 그런 기사를 쓴 겁니다. 문제 있으면 알아서 하세요."

그 기자는 계속해서 분노하다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신문사는 발칵 뒤집혔지만, 신생 언론이 이슈 파이팅조차 하지 못한다면 존재가치는 물론이고 경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며 나는 그들을 다독였다.

그해 말(12월)에는 한국인을 비하하는 칼럼(습관적으로 거짓말하는 한국인, 진완바오 11월 16일자)을 실은 중국 10대 유력지인 진완바오(今晩報)에 사과 기사를 요구하는 작업을 벌여 실제로 사과문(12월22일)을 받아내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한국 대기업이나 다양한 곳에서 항의해 왔다. 따리엔에 있는 대기업의 건설사 기사를 썼다가 현지로 파견됐던 특파원이 칭다오까지 피신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실 소규모 신문사가 중국 권력과 관시가 많은 대기업을 건드리는 일은 쥐가 고양이 건드리는 것과 같은 행위다. 하지만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중국에서 교훈을 한가지 깨달았다. 중국 공산당은 역린(逆鱗)을 건들지 않고, 정당한 주장을 한다면 어지간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역린이라는 말은 한비자에 등장하는 말이다. 용을 잘 다루면 타고 하늘에 오를 수 있지만, 실수해 목 아래 있는 거꾸로된 비늘(逆鱗)을 건들면 바로 죽임을 당한다는 것으로 주로 황제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에 빗대어 나온 말이다.

나는 어렴풋이 그 역린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실 언론인이 스스로의 감시기제를 작동시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중국이라는 토양을 기초로 한 이상 그것을 지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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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에서 밀려났지만, 중국 공산당의 위협을 이겨내고 대만을 만들어냈다. ⓒ 조창완


2000년 대 중국 정치·문학에 대하여...

중국에서 또 한가지 쉽게 언급할 수 없는 문제 중에 하나가 대만이다. 홍콩 반환(1997년 7월 1일)과 마카오 반환(1999년 12월 20일)에 고무된 중국은 대만 문제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2000년 3월 18일 치러지는 대만 총통선거였다.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은 1986년 설립된 중도좌파 계열의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간칭 민진당)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본토인에게 정치적 감정이 깊었던 원주민들이 주로 참여했고, 독립을 주요 강령으로 한 민진당의 새 총통 후보 첸수이볜(陳水扁 1950~)은 국민당에게는 막강한 상대였다. 타이난의 소작농 출신인 그는 변호사 출신으로 타이베이 시장을 지낸 당시 50살의 첸후보는 무소속 쑹충유와 국민당 롄잔을 누르고 총통에 당선됐다. 39%의 득표율이었지만, 이인제 후보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태생적으로 중국과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던 첸수이볜은 정치적 어려움 속에 있었지만 2004년 선거에서 국민당 롄잔 후보를 3만표 차이로 이기고 총통에 당선된다. 하지만 첸총통은 퇴임 이후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최근에는 치매설에 빠지는 등 안타까운 운명 선을 걷고 있다. 첸총통 이후에는 국민당 계열의 마잉주(馬英九 1950~)가 당선된 후 재선되어 2015년까지 이끈다. 마총통은 중국 본토의 객가인 출신으로 아무래도 본토와의 관계가 원활하다.

이런 이후 과정을 보더라도 2000년 대만 총통 선거는 본토에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더욱이 본토와 적대감이 있는 민진당 계열의 첸수이볜은 부담스러웠다. 그 때문에 연초부터 주룽지 총리는 대만의 독립의지에 대한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50년 국민당 정권에 지친 대만인들이 국민당 후보에 준 표는 23%였던 반면 첸수이볜이 받은 표는 39.3%로 무난했다. 중국의 반발은 커졌지만 첸수이볜은 '독립'이라는 단어를 피하는 등 본토와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해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화를 피해갔다.

중국에서 대만 문제는 양안관계(兩岸關係)로 흔히 묘사된다. 중국 본토인 샤먼에서 간조시 1.8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진먼다오(金門島)는 포격 등으로 항상 첨예한 갈등 상황이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대만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한족 출신의 대만인들의 수구초심과 중국의 경제적 이해가 엮이면서 2000년에는 이미 두 나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톈진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참석한 테니스회에도 골드미스인 대만인 주재원 여성분이 있었다. 그 여자분은 대만 원주민 출신이어서 한족과의 관계에 복잡한 감정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현재 대만 수출의 40%를 중국이 차지하는 상황이어서 정치적 입장만을 내세우는 데는 이미 한계가 있었다. 수출입 뿐만 아니라 중국내에는 식품류 방면에 대기업인인 캉스푸(康師父)를 비롯해 전자 등에서 절대적으로 중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극단으로 갈 확률은 그만큼 없는 상황이 됐다.

2000년 10월 12일 중국 작가로는 최초로 가오싱젠(高行建)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중국인이면서도 중국의 역린을 건드린 위대한 작가다. 1987년 중국을 떠나 다음 해부터는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아 파리에 머물고, 다음 해인 1989년에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지지해 중국에서는 금기어가 된 상황이었다. 이후에 비슷한 여정을 겪는 '비취의 눈'의 작가 다이앤 웨이량이나 중국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지만, 해외파로 생각되는 장리지아(張麗佳)나 다이시지에(戴思杰) 같은 작가들도 나왔다.

가오싱젠의 수상작 <영혼의 산(靈山)>은 의사의 오진으로 죽음을 기다리다가 다시 삶을 찾아 영혼의 산을 찾는 '나'를 다양한 형식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폐암을 선고받았다가 오진으로 밝혀진 후 창지앙(長江 양쯔강)을 2년간 헤맨 그의 취재를 바탕으로 했으며, 창지앙과 샹그릴라의 만년설산 속에 녹아있는 다양한 신화와 무속을 바탕으로 했다.

설산을 완전한 고독 속에 있는 인간의 시원(始原)으로 바라본 그에게 교조적 사회주의에 빠져있는 사회는 암울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저항에 들어섰다. 그 역시 중국 혁명성지 징강산의 입구 도시인 지앙시성 간저우였다는 것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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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은 독일이나 러시아에 온 정치 고문들이 결정권을 가졌지만 준이 회의를 통해 마오쩌둥 등 본토 출신 지도자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그 계기를 만든 준이 회의터.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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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이 넘어가던 시절 첫 운남여행에서 찾은 스쿠진 홍군장정군 도하 기념비. ⓒ 조창완


#중국 #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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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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