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7일, 두 장의 새 잎을 낸 모티프원 블랙방의 참나무. 글쓰기는 겨울동안 죽은 듯이 있었던 나무가 초록의 잎을 내듯 잠재되었던 내면을 의식 속으로 끌어올려줍니다.
이안수
매일 글을 씁니다. 내가 나를 가르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이순(耳順)을 앞두고 서툰 인생을 배우기 위해 학교를 찾아가기도 어렵고, 일상에 매여 있기도 해서 학교 갈 시간을 내기도 쉽지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가르칠 수밖에…….
다행히 교재는 주변에 늘려있습니다. 모티프원을 방문하는 분들이 '툭' 던지는 몇 마디에도 진주가 그득하고 나뒹구는 책의 몇 줄에도 구슬이 촘촘합니다.
거저 얻은 그 진주와 구슬을 꿰어 내가 나를 가르칩니다. 그 도구가 글쓰기입니다.
공부를 하기 싫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가르치는 그 글쓰기 시간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기를 원하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다스려줄까.
신경숙 작가가 글쓰기가 두렵다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글쓰기를 시작하기가 두려워서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마치고 핑계거리가 없어지면 할 수 없이 책상 앞에 않는다는 오래전의 얘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테지요.
내가 나를 가르치기 위한 글쓰기이므로 배움과 수행의 글쓰기인 셈입니다.
이 수행의 글쓰기는 경험, 숙성, 반추, 체화, 실천의 순서로 내 생활에 반영됩니다.
이 배움은 만용으로 넘쳤던 대학공부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더 다가가게하고 더 사랑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하니 말입니다. 대학공부보다 비용도 훨씬 적게 들지요. 늘 깨어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고 모든 일과가 끝난 뒤에도 글을 써야하는 물리적인 시간을 할애해야 하므로 체력적으로는 좀 부치는 일이긴 합니다.
이 일이 간혹은 남에게 미움을 사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체험한 방법이 효험이 좋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니 이 방법을 자꾸 남에게 권하게 되고 그것이 타박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로 다져진 인내는 그런 타박도 무릅쓰게 하니 글쓰기의 효험이 좋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이지 흥분이 됩니다. 매일 아침 3페이지 이상의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창조적이며 주체적으로 세우는 '모닝 페이지'회원 같은 분들입니다.
자신의 공부를 위한 글쓰기라고 하더라도 글이 공개되는 것이라면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겠다 싶습니다.
아래의 네 가지는 늘 마음 쓰는 요소이지요.
누구를 위한 글인가?직접 경험했는가?의심했는가?긍정을 얘기하는가? 글쓰기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들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글쓰기가 수학공식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더 두려운 것은 그 책이 말하는 데로 쓸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대신 자연의 죽살이 관찰에 더 관심을 두고, 저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바싹 다가앉기를 택합니다. 그 속을 헤집어보면 얼마나 조화로운지 시간 흐르는 것을 잊게 되고, 얼마나 감동적인지 제 삶이 쑥스러워 면목이 없기가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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