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 시절 직원이자 동반자 였던 영훈이열하기행을 위해 네이멍구 사막으로 갔을 때 장난삼아 활을 쏘는 모습. 지금은 베이징 교외에서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조창완
우리 가족이 만났던 가장 소중한 인연은 최영훈 팀장이다. 직원이 필요하자 주변에 사람을 추천받았다. 그 가운데 최영훈팀장이 있었다. 옌지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투 출신의 최팀장은 부모님이 한국으로 돈벌러 떠난 후 고향에서 자란 전형적인 조손가정의 청년이었다.
학력은 낮고 여행사 경험도 없었지만, 짧은 만남으로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겼다. 최팀장은 2008년 우리 가족이 급작스럽게 귀국한 후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베이징 사무실을 꾸려가는 등 그 신뢰를 지켰다.
다만 내가 여행사업에서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같이할 일도 적어지고, 거리가 멀어 만날 수 있는 일들이 줄어서 이제는 서서히 멀어지는 인간관계다. 지금은 베이징에서 반찬가게를 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최팀장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신뢰하고, 멀리 같이할 친구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내 중국에서의 인간관계에 큰 오점은 없다. 그런데 한국 사람과는 별로 좋지 않은 인연이 있다. 나를 찾아와 직원으로 같이하다가 회사가 합병하는 도중에 중국 동포 사장에게 건너가면서 다시 연락을 하지 않는 한 친구가 가장 안타까운 인연이다. 그 사이에 만났던 중국 동포 사장도 나에게는 뼈저린 기억이지만, 동업이라는 어려운 숙제 속에 있었던 만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 비해 최 팀장은 나에게 중국 동포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해준 동생이다. 부모님이 떠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때로는 거칠게 크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당당하게 했던 믿을 만함 동행이었다. 최 팀장 또래의 조손가정은 사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중요한 화두다.
분단 상황에서 중국 속 동포들은 높은 학력과 창의력 등을 바탕으로 과학, 교육은 물론이고 군계에서 나름대로 큰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찾아온 돈벌이에 역량이 집중되면서 이런 동포 사회의 힘은 약화됐다. 특히 부모가 떠난 후 조부모 사이에서 자라나 조손가정으로 불리는 동포 3~4세대들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대들은 나름대로 정체성을 가지면서 최 팀장처럼 그 역할을 찾아가고 있었다.
5월 23일 일본을 방문 중이던 중국 국무원 우이(吳儀) 부총리가 23일 저녁으로 예정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의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귀국 길에 올랐다. 이유는 앞선 16일 고이즈미 총리가 중의원에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외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며 참배 강행 의사를 비친 것이 중국을 자극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1938년생의 우이 부총리는 쑹칭링이나 덩잉차오 이후 중국 여성 정치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베이징석유대학을 졸업한 테크노그라트로 대외통산분야에서 성장해 부총리를 역임한 여걸이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칼라 힐스와 지적재산권 다툼을 할 때 밀리지 않았고, 2003년 사스때는 위생부 부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혼란을 극복했다.
그녀는 WTO 가입이나 상하이 엑스포 유치 등을 주도하는 등 중국 당대 여성정치인으로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그녀를 잇는 여성 정치인으로 17기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류옌둥이 진입했지만, 우이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해 우이의 일본 총리 면담 거부는 중국이 가진 근대사에 대한 입장을 잘 대변한다. 특히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문제는 물론이고 오키나와 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영토나 해양문제가 겹쳐서 더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더 나쁜 상황을 향해가고 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은 2009년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있었다. 하지만 변화는 담보되지 않았다.
자국 과거사에 대한 사죄의 자세가 없고, 일반인들의 인식안에 분쟁 영토나 독도 등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그대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인 아베 신조가 수상인 상태여서 이런 상태는 더욱 고착되어 동아시아 갈등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