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탑 오른 이 남자, 사랑 때문이었다

[서평]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 <내 안의 보루>

등록 2014.03.14 08:26수정 2014.03.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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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4일 밤 경기도 화성교도소 앞. 수백 명의 시민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3년 만기를 채운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0시를 기해 출소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5일 0시 2분, 마침내 한상균 전 지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김정우 지부장이 다가가 한상균 전 지부장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김정우·문기주 두 사람은 마치 한상균 전 지부장의 양쪽에 꼭 붙어 걸으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한상균 전 지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고진의 <내 안의 보루>(컬처앤스토리)는 한상균 전 지부장과 금속노조 활동가 김혁이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이끈 과정을 담았다. <내 안의 보루>는 소설 형식을 지녔지만 두 사람의 치열한 인생 여정이 담긴 자전적 실화에 더 가깝다.

"도망칠 생각이었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내 안의 보루>(고진 씀 | 컬처앤스토리 | 2014.03.03 | 1만3000원) 표지. 그리고 77일간 옥쇄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내 안의 보루>(고진 씀 | 컬처앤스토리 | 2014.03.03 | 1만3000원) 표지. 그리고 77일간 옥쇄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컬처앤스토리
한상균 전 지부장은 <내 안의 보루>에서 출소 당시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다.

"화성교도소를 나오던 그 날 밤까지 부끄럽지만 어디론가 도망갈 궁리를 했네. 비겁자로 살아가는 게 차라리 내가 진 업보보다 낫다고 보았네. 무수히 많은 이들의 얼굴이 내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박혀 있는데, 난 그들을 보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네….

그런데 나를 보러 온 수백 명을 보면서 도망갈 용기를 잃었네. 이런 건 뭐라 해야 하나? 가슴이 뛰면서, 울컥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일세. 그들 속에서 내가 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왜 그리 막막하던지 모르겠네. 난 다시 기대 곳이 없는 허허벌판에 선 느낌이었지. 그래서 외로웠다네."(<내 안의 보루> 중, 주인공 한상민(한상균 전 지부장)이 김준(김혁)에게 건넨 쪽지 내용)


만기출소한 한상균 전 지부장의 발목을 잡은 것은 교도소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수백 명의 시민들이었다. 그 수백 명의 시민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한상균 전 지부장은 출소 한 달 뒤, 복기성·문기주와 '쌍용자동차 사태 국정조사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경기도 평택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이 바라보이는 30m 높이 송전탑 위에 올라 171일간의 고공농성을 벌인다.

 2012년 11월 20일 오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한상균 전 지부장 등 세 명이 쌍용차 정리해고 관련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송전탑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2012년 11월 20일 오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한상균 전 지부장 등 세 명이 쌍용차 정리해고 관련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송전탑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한상균 전 지부장은 왜 다시 철탑에 올랐을까. <내 안의 보루>에서 금속노조 활동가 김준(김혁)에게 건넨 쪽지에서 한상민(한상균)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보게, 혼자 올라가서 미안하네. 그렇게 되었네. 아마 자네가 이 글을 읽는 그 순간에도 나는 왜 올라야 하는가 하고 자문하고 있을지 모르네. 스물세 번째 노동자가 죽었네. 내가 형님처럼 모시던 분이었지.

장례식장에 동료들하고 갔었네. 부조도 없이 밥만 축내는 놈들이란 비아냥거림을 받으며 씁쓸한 마음으로 나왔네. 누굴 원망하겠나. 유족들에겐 버러지 같은 놈들이었지만, 그래도 모금을 했네. 겨울비가 내렸지. 몇몇 동료와 근처에서 소주를 먹는데 글쎄 이선희가 부르는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가 나오는 게 아니겠나. 아, 뭐라 해야 하나, 자네는 내 맘을 알지 않겠나. 노래가 꾸밈없이 슬펐네. 여보게, 외로웠네."

옥쇄파업을 하고, 목숨을 걸고 크레인과 철탑에 오른 이들은 냉철한 이성으로 점철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밖에 모르는, 그저 한없이 따뜻한 가슴과 마르지 않는 눈물샘을 지닌 여린 사람들이다.

소박한 바람을 지닌 사람들

쉰두 살 여성으로 25미터 고공 크레인에 올라 겨울·봄·여름·가을을 보내고 308일 만에 땅을 밟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바람은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해고되지 않고 일하며 돌아가 새끼들을 앞에 앉히고 저녁 밥상을 받는 평범한 일상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동료를 스물네 명이나 잃어야 했던 쌍용차 해고자인 한상균·복기성·문기주는 더 이상 동료의 죽음을 두고 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송전탑에 올랐다. 옥천 대형 광고탑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유성기업 이정훈 영동지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남들처럼 퇴근해서 "다녀왔어"라고 하며 가족 품에 안기는 소박한 바람을 지녔을 뿐이다. 모두 '사랑'을 지켜내고, 가정을 지켜내고, 동료를 지켜내는 게 마지막 보루인 사람들이다.

내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임무창씨의 죽음으로 자녀들이 고아로 남겨진 시점이었다. 스물네 번째 죽음 이후 대한문에 분향소가 설치·철거가 반복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차마 대한문을 떠나지 못하고 집처럼 드나들었다. 끝내 분향소가 철거되고 임시 화단이 만들어졌을 때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SNS를 통해 대한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리며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는 일이었다.

두 남자의 마지막 보루는 '사랑'이었네

 2012년 8월 5일, 한상균 전 지부장 만기출소한 뒤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닿은 모습.
2012년 8월 5일, 한상균 전 지부장 만기출소한 뒤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닿은 모습.노동과 세계

내가 만난 한상균 전 지부장. 그는 참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만나는 이가 누구든 머리를 깊게 숙이는 인사와 함께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 그렇게 따뜻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이 어떻게 1000여 명의 노조원과 전쟁과 같은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이끌었을까. 3년 만기 출소 후 겨우 한 달 만에 어떻게 또 171일간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동료에 대한 신뢰가 깊고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노동자로 살아서 조금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파업을 이끌고 철탑에 올랐던 한상균 전 지부장. 그가 마지막 그 안에서 지켜내려고 한 것은 어쩌면 일터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랬다. 대한문 앞에서 만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수줍음 많고, 정 많고, 눈물 많은, 사랑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쌍용차지부 고동민 조합원의 별명은 '울보'란다. 김정욱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은 경찰의 폭력에도 "우리가 무슨 불법을 저질렀습니까? 불법이면 말해 보세요"라고 외칠 뿐 욕설 한마디 하지 못한다.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열불이 나서 큰소리로 따지다가 몸싸움을 하고, 욕설을 주고받아도 말이다.

또 우직하게 노동운동의 길을 걷고 있는 김혁 활동가를 보면서 문득 깨닫는다. 사람 살이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이만이 "함께 살자"를 외치며 지치지 않고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랑'밖에 모르는 두 남자의 보루를 지켜내려는 끈질긴 투쟁이 담긴 <내 안의 보루>.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지켜내고 싶은 내 안의 마지막 보루는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내 안의 보루>(고진 씀 | 컬처앤스토리 | 2014.03.03 | 1만3000원)

<내 안의 보루> 출판 인세 전액은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을 당하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위하여 아름다운재단의 긴급지원 사업 <노란봉투>에 기부한다고 합니다.

내 안의 보루 - 서로에게 보루가 된 두 남자, 한상균·김혁의 이야기

고진 지음,
컬처앤스토리, 2014


#내 안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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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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