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반장이 영수라고? 선거 다시 하자"

초등학교 학급 회장 선거 앞두고 30년 전 생각이 났습니다

등록 2014.03.16 21:24수정 2014.03.16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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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방영된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한 장면 ⓒ MBC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 따져보니 그때는 1987년이었네요. 학교를 다니며 수많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3학년 시절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그때 난 학교를 청소하러 간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도 때도 없이 왁스와 걸레로 교실 바닥에 광을 내야했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모두 교실에 남아 청소를 했죠.

"또 청소구나. 오늘은 집에 언제쯤 갈까" 하며 바닥 광내기를 시작하는데 창문 너머로 예쁘게 차려입은 반 친구의 엄마가 보였고, 선생님은 황급히 뛰어나가 인사를 했습니다. 엄마와 선생님의 한바탕 웃음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선생님은 밝은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와 말했습니다.

"철수(가명)야~ 집에 가야지. 가방 챙겨서 나오렴."

그 아이가 가고 난 뒤에도 한참을 바닥에 광을 내고 나서야 나머지 아이들은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몇 번을 보고 나서 열 살짜리 3학년 꼬마들은 선생님이 없는 은밀한 장소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우리는 안 보내주고 철수는 보내주잖아. 어디서 들었는데 그런 걸 차별이라고 한대. 우리 선생님 차별 너무 심하지 않니?"

어느 날 머리가 너무 아프고 어지러웠습니다. 청소한다고 책상을 뒤로 밀고 서 있다가 화장실 갈 겨를도 없이 책상과 바닥 위에 먹은 것을 다 토해버렸죠. 그때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도망갔고, 선생님은 몹시 짜증나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습니다.

"네가 치워라."


그걸 어떻게 치웠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아프고 서러웠던 기억, 계속 눈물이 났던 기억만 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간 병원에선 '수두'라고 했고, 다음 날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반장 후보를 선생님이 미리 정해두던 시절


학교야 어쨌든, 수업을 마치면 친구들과 어울려 잘 놀았는데 그 가운데 성격이 온순하고 따뜻해서 아이들이 좋아하고 따르던 영수(가명)라는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2학기에 반장 선거를 하는데 많은 아이들이 그 아이를 찍었죠. 정말 그 아이가 편하고 좋았거든요. 그래서 그 아이가 반장으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 영수가 반장이 됐네" 하더니 "반장선거 다시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우리들은 다시 반장선거를 했는데, 더 웃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수가 더 많은 표를 얻어 반장이 된 것입니다.

아직도 그때 선생님의 그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은 누가 되길 바란 걸까요? 선생님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반장을 왜 애들이 뽑게 하는 거야. 내가 정해주면 되는데"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반장선거 후보는 선생님이 정해준 기억이 납니다.

반장선거를 할 때면 선생님이 어떤 종이를 들고 와서 칠판에 이름을 적었죠. 내 이름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초조하게 칠판을 바라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이 반장선거 후보가 된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얻어낸 대통령 직선제 영향이었을까요? 1990년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본인이 원하면 반장선거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거 전날 친구들 앞에서 발표할 출마의 변을 써야 한다고 엄마와 아빠를 귀찮게 했거든요.

"야, 너 반장 됐는데 왜 아무것도 안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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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 세종로네거리 동화빌딩앞에서 국정원시국회의 소속단체 회원들이 '선거조작 간첩조작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을 촉구하는 긴급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 권우성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그 사이 저는 교사가 됐고, 올해 6학년 학생들의 담임교사와 학생회 업무를 맡았습니다. 3월에 치러야 하는 학급 정·부회장 선거를 계획하면서 선출 규정을 살펴봤습니다.

"<3. 선출방법 1> 모든 아동이 후보 대상자이며"란 문구에 눈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새삼스럽습니다. 교사가 돼 10여 년이 넘게 한 해에 두 번 반장선거를 치르면서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선출 규정에 '모든 아동이 후보 대상자이며'란 말을 보니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그동안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절차적 민주주의는 많은 부분 성숙해졌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제도가 사회와 기관 곳곳에 만들어졌습니다. 학교에서도 운영위원회를 통해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게 됐고, 중요한 사항은 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해 결정하게 권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 말기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이만하면 됐다. 이제 돈 버는 일에 좀 더 신경 쓰자."

그런데 그 때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잘 갖춰졌다고 하는 지금, 왜 사람들은 다시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치고 있을까요.

교실은 작은 사회... 정말 민주주의는 이만하면 됐나요?

반장선거라는 제도가 교실 안의 민주주의를 완성시키지는 않습니다. 제도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잘 구현하고 있는 정·부회장 선거임에도 아이들은 여전이 반장을 자기들이 뽑은 대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선생님 심부름 해주는 사람이거나 선생님이 없을 때 선생님 대신 애들을 감시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장은 친구들에게 피자나 햄버거를 돌릴 수 있는 엄마와 아빠를 둔 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하게는 예쁘고 잘생겨야 표를 많이 얻을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반장을 뽑아놓고 먹을거리를 돌리는 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심지어 독촉하기도 하지요.

"야, 너 반장 됐는데 왜 아무 것도 안 돌려?"

이렇게 먹을 것을 돌리면 반장이 해야 할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장이 된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교사인 내가 없으면 앞에 나와 아이들 이름을 적습니다. 떠드는 아이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이름을 적는 거지요.

내가 교실로 들어서면 이름 적힌 아이들은 억울해하며 "반장은 자기랑 친한 친구들 이름은 안 적어요"라며 화를 내고, 반장은 "아이들이 저한테 '네가 반장이면 다야. 선생님 있을 때만 착한 척이야'라고 말했다"고 서운해하며 울먹거립니다. 교실은 작은 사회라더니 딱 그렇습니다.

이 글을 쓰고 학교를 가면 2014학년도 1학기 학급 정·부회장 선거를 해야 합니다. 작년처럼 아이들에게 선거 전 '지식채널e 늑대들의 합창'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늑대들은 어떤 기준으로 우두머리를 뽑는지, 나머지 늑대들은 우두머리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늑대들은 10마리 이상씩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는데, 싸움을 잘하고 난폭한 늑대는 리더에서 제외된다, 리더의 난폭함 때문에 다른 늑대들이 무리에서 떠나면 그 공동체가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뽑아놓기만 하면 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대표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우리가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또 새삼스럽지만 제도만 앙상하고 초라하게 남은 민주주의를 살찌우고 꽃피우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시민들이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더 힘을 내야겠습니다.
#반장선거 #민주주의 #87년 유월항쟁 #노무현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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