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기 위해 5일 밤낮 버스를 탔다

[공모-사랑이 뭐길래] 그와의 거리, 구천육백사 킬로미터

등록 2014.03.23 17:54수정 2014.03.2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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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 짧아졌다. 이제 두 사람만 버스에 오르면 내 차례다.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이끌고 줄의 맨 끝으로 돌아갔다.


줄이 다시 짧아졌다. 미루고 미루던 순간이다. 오전으로 예약한 버스를 밤으로 미뤄 반나절의 시간을 벌었다. 이렇게 줄 뒤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며 10분을 더 벌었다. 더는 결정을 미룰 수 없다.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지난 6일.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지금,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아무 말이 없다. 마지막 한 사람이 짐을 화물칸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내 안에서 헐떡거리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버스 차장이, 지금 타지 않으면 버스가 출발할 거라고 나를 재촉했다.

차라리 버스를 떠나 보낼까. 잠시 후면 내려질 나의 결정이 두렵다. 여기에 남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둘 다 두렵다. 마치 줄타기를 하며 왼쪽으로 떨어질까, 오른쪽으로 떨어질까를 고민하는 순간처럼, 무섭고 두렵다. 줄 위에 남는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어느 쪽으로든 떨어져야 한다. 어느 쪽으로 결정 나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버스에 오르면, 그와 나는 이걸로 끝이다. 버스는 도시를 빠져나갈 것이다. 버스는 미국 북부의 5개 주를 거슬러 올라가 내가 있던 도시, 파고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일 주일 후, 나는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을 건너 나의 고향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LA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9604km. 구천육백사 킬로미터라는 단어가 가슴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결국, 나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심장에 큰 바위가 던져진 듯 철렁했다.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다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매여있던 울음을 베개 속으로 조금씩 쏟아냈다.


안 지 2주밖에 안 된 남자, 나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함께한 시간
함께한 시간이수지

"와서 뭐하고 싶어?"


그가 메신저로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여행. 긴 고민 끝에, 1주일 전 파고를 떠난 그가 있는 LA로 가기로 했다. LA라면 지난 겨울에도 갔지만, 상관없다. 안 지 2주밖에 안 된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편안했던 마음 맞는 좋은 친구다. 비행기 대신 버스표를 끊었다. 이틀 밤낮을 타야 하는 버스다. 그래도 신이 났다. 우리는 메신저로 샌디에이고와 멕시코로 떠날 여행, 그리피스 천문대, 미술관, 비틀즈 추모 콘서트 등에 대해 얘기했다.

난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LA는 왜 왔던 걸까. 친구로 그를 다시 만나러? 그를 좋아해서? 나도 모르는 마음을 어쩌려고 여기까지 온 건지. 잘 모르겠는 마음이었다면, 모르는 채로 그렇게 끝냈으면 될 것을. 혹여 LA로 와서 마음을 확인한다고 해도, 이렇게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미래가 없는 관계. 어찌할 수도 없는 감정을 키워 이렇게 힘들기만 할 것을.

버스는 달렸다.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네바다에서 유타로. 콜로라도로. 네브래스카로. 사우스다코타로. 영원할 것 같은 평지와 들판, 혹성의 한 지역처럼 펼쳐진 유타주의 붉은 암벽, 길게 이어진 강물. 눈이 닳도록 울다 머리가 아파 창가에 기대 잠들었다. 

흘러간 시간들이 떠올랐다. LA를 떠나기로 한 날. "오늘이 마지막이네"라는 그에 말에 울컥해 얼굴을 돌리고 묵묵히 짐을 챙겼다. 터미널 근처의 슬럼가. 주먹 쥔 손을 슬며시 펴, 그의 손을 스치듯 마주 잡았다.

샌디에이고에서 LA로 돌아오는 버스 안. 잠들어 있는 그의 셔츠를 만지작거리다, 불현듯 쏟아져 나와 그치지 않는 눈물에 당황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마음이 흔들렸던 건. 내 마음은 흔들렸던 걸까. 이것은 사랑인가. 나의 눈물은 그를 떠나기에 흘리는 눈물인가. 아니면, 지난 1년간의 미국생활이 끝나가기에 흐르는 눈물인가.

 LA 그리피스 천문대
LA 그리피스 천문대이수지

두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를 어두컴컴한 버스 안의 현실로 다시 불러들였다. 두 아이는 밤새 울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젊은 엄마의 앙칼진 욕설이 이어졌다. 아이에게 저렇게 욕을 하는 엄마도, 아이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그를 사랑하나. 사랑? 친구로 지낸 지 2주에,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지 반나절밖에 안 됐는데, 사랑?

새벽 3시. 콜로라도 주의 한 편의점에 도착해 5시간을 대기했다. 예약한 버스 시간을 바꿔 시간을 번 것에 대한 대가다. 출발 시간을 바꾸는 바람에 버스 간 스케줄이 꼬여, 장시간 대기를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더 보내야 파고에 도착한다. 편의점 구석 테이블에 엎드려, 잠시 나의 무모함에 감탄했다. 공중전화로 탐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콜로라도쯤 왔어요."
"수지,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네 룸메이트 제시카가 네가 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고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다고."
"아…. 제시카에게 전화하는 걸 깜빡했네. 미안해요."
"그와는 잘 헤어졌고?"
"…. 네."

나는 LA에서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 그를 사랑하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수지, 내 나이 육십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건대, 누군가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왕복 5일 밤낮을 여행하는 건,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한국, 그는 LA... 사랑이라면 어쩔 텐가

 LA 미술관 재즈콘서트
LA 미술관 재즈콘서트이수지

사랑이라면 어쩔 텐가. 나는 파고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고, 우리는 끝났다. 사랑이었다고 할지라도, 떠나오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한국으로 돌아가 살아낼 나의 인생이 있다. 그에겐 LA에서 새로 시작할 그의 인생이 있다.

지금의 나의 인생과 지금의 그의 인생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LA에 머물 수는 없다. 나는 나다. 사랑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고 해서 내 존재를 모두 바꿔 버릴 순 없다. 그가 나에게 끌렸다면, 그가 끌렸던 건 나라는 오롯한 존재다. 상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변해 버리는 내가 아니다.

아니지. 희생도 없이 사랑은 무슨 사랑. 아무리 강하게 느껴도, 자기 스스로가 더 중요해서 떠났다면, 그게 무슨 사랑. 사랑이라고 해도, 하루 만에 끝나 버린, 다시는 볼 수도 없는, 미래 없는 관계가 다 무슨 소용.

아니, 소용이 없진 않아. 나는 마음을 다했으니까.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알았기에, 내 마음에 솔직하고 충실하고 용감할 수 있었을 테다. 그랬기에 그가 내민 손을 주저 없이 잡을 수 있었을 테다.

그랬으니까. 나는 두 눈을 감고, 그는 두 귀를 막고, 서로를 앞뒤로 붙잡아 긴 언덕을 내려오는 바보 같은 짓도 할 수 있었을 거다. 육십 살이 되어 다시 만나자는 장난스러운 농담에도, 그래, 그때라도 보고 싶다, 라는 진심을 담았을 터다.

나는 마음을 다했다. 그리고, 아직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많다. 그때의 순간이 중요했듯, 지금의 마음도 중요하다. 나는 수첩 한가운데에 적어놓은 그의 전화번호를 펼쳤다. 다이얼을 돌렸다. 그를 만나러 LA로 갔던 그 마음으로.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그에게 마음을 표현해서 어쩌자는 건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을 뿐이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감쌌다.
덧붙이는 글 사랑이 뭐길래~ 응모글
#사랑이 뭐길래 #사랑 #이별 #여행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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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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