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3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과 신뢰 이미지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고사가 '미생지신'이다. 지난 2010년 세종시 수정 논란이 달아올랐을 때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정몽준 의원과 박근혜 의원의 논쟁은 유명했다.
정 의원이 먼저 공격했다. "미생이 애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익사했다"며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했던 박 대통령을 미생에 빗대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었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며 "세종시 원안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공약해선 안되는 것이었고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라고 맞받아쳤다.
결국 세종시 원안은 지켜졌고 박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신뢰 이미지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또 3년 뒤에는 대통령이 됐다.
미생의 고사를 둘러싼 공수 4년 만에 뒤바뀌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 미생지신은 부메랑이 됐다. 지난 30일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지금 박 대통령은 미생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며 박 대통령의 기초선거 무공천 공약 번복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4년 전 미생의 처지라면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며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안했다.
원내 의석 130석의 제 1야당 대표의 제안에 청와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철저한 무시 전략이다. 그동안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대통령에게 해가 되는 사안이 생기자 침묵을 유지하면서 책임을 여당에 넘겼다.
대통령 대신 공약 폐기를 사과하고 나선 것도 여당이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일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국민과의 약속은 천금과도 같은 것인데 이 약속을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하게 됐다. 고개 숙여 사과 드린다"고 말했다. 여권 내에서 처음 나온 사과 목소리였다.
하지만 기초선거 무공천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지난 대선 때 기초선거 공천 폐지는 당시 새정치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안철수 후보가 먼저 들고 나왔지만 이에 질세라 박 대통령은 기초의원은 물론 기초단체장 공천까지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선 직후인 지난해 초만 해도 여권은 기초선거 공천 폐지에 소극적이던 민주당을 연일 비난했다. 하지만 막상 지방선거가 닥치자 돌변했다.
여당 내부에서는 "당시 정치 쇄신 분위기에 편승한 무리한 공약이었다"는 이야기가 연일 흘러나왔다. 청와대 내에서도 "기초선거 공천을 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뻔한데 그래도 약속을 지키는 게 우선일 정도로 무공천이 절대적 가치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미생의 고사에 대입하면 기다리면 익사할 게 뻔한데 다리 밑에서 기다리자고 하는 야당의 주장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이다. 미생의 고사를 둘러싼 공수가 4년 만에 뒤바뀐 셈이다.
여당 원내대표의 대리 사과, 무책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