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블라스 거리의 화가들이다.톡 쏘는 개성이 살아있는 그림이 거리의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이성애
화가의 솜씨 때문인지, 소녀들의 발랄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람블라스로드의 숨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생각보다 저렴한 그림 값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현과 쭈를 화가 앞에 앉혀 본다. 한국에서도 안 해 봤던 일이다. 이 그림은 이 아이들에겐 생애 최초의 캐리커처가 되겠지.
그때 아직 여행이 많이 남았음이 떠올랐다. 순간 멈췄던 이성이 작동한 것이다. 여행자에겐 그림을 보관하는 것 또한 하나의 짐이 될 것이 뻔하여 화가에겐 이유를 들어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평균적인 그 또래보다 유순하지 않은 나의 자녀들이 의외로 순순히 일어선다. 희한하네.
저기 저 자리였던 것 같다. 3년 전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출산 종료를 기념하는 나만의 여행'을 왔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이 '헉' 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모성애란 것이란 것이 없지는 않아 비교적 짧게 1주일을 왔었다. 그때도 이곳은 아름다웠다. 밝은 햇살은 사람들의 옷을 더욱 발랄한 색상으로 입혀주고 다국적 여행자들의 다양한 표정, 여행 방식, 생김새를 돌아보는 것만도 재미있고 설렜다. 길 위엔 꽃 가게도 많고 이 쪽 저 쪽 골목길을 들여다보면 엄청나게 많은 인파의 머리들이 골목골목 동동 떠다니는 것 또한 경이로웠었지.
그래, 계속 걷다보니 다리가 아팠어. 그래서 좀 만만해 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언니와 함께 빠에야와 음료를 먹었지. 양이 많았기에 빠에야 1인분에 탄산음료를 시켰었어. 정말 여유롭게 눈알과 머리를 굴리며 길거리를 관람하다 계산을 하려고 도로 건너편 식당의 카운터에서 영수증을 받고 나서야 남들은 다 걸어 다니는 이 거리에 앉아서 유유자적 거리를 관람하며 밥을 먹는 대가가 원래 식당 건물 실내에서 먹는 가격 보다 좀 많이 비싸다는 것을 알았더랬지.
여행경비가 넉넉지 않아 많이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 그냥 모든 게 다 좋았으니까. 이성은 들락날락하고 오감이란 감각이 충만한 람블라스로드의 공기를 마셔서 그랬을까?
아이들을 위해 잠시라도 어딘가에 앉아 쉬기로 했다. 너무 많은 인파에 앉을 곳도 마땅찮다. 3년 전 기억을 더듬어 그 광장을 찾아냈다. 분수대 난간에 기대 있는데 남편이 앞에 보이는 가로등이 바로 가우디의 첫 작품인 것 같단다. 정말 자세히 보니 독창적이고 범상치 않은 것이 가우디의 작품이 맞았다. 3년 전 난 이곳에 앉아 무얼 보았던 것인지 부끄러웠다. 지금 딱 이 자리였었는데. 가우디를 좋아하는 사람들, 유명 장소를 골라 다니는 여행자들이 알면 온갖 욕과 비난을 다 듣겠다. 눈썰미는 됐고 그냥 나의 무식, 게으름이 죄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자만 그땐 두 돌이 갓 지난 큰 아이와 갓난쟁이를 키우며 숨만 쉬고 살던 때였다. 예술품을 알아보는 미적 감수성, 여행지식, 바지런함 그건 것들은 사치였다.
우린 그곳에 앉아 보케리아 시장에서 사온 체리를 씻지도 않은 채 쪽쪽 빨아 먹었다. 농약의 양이 적당한지 어쩐지 맛이 참 좋다. 방금 전 보케리아 시장에서 어떤 남미 사람의 생김새를 가진 현지인이 나에게 가방이 열려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놈이야!'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웃음이 났다. 왜냐하면 돈은 그 곳에 없었으니까. 그곳엔 빈 점심 도시락만 달그락거리고 있었으니까. 바보 메롱.
"녀석, 뒤지고서도 짜증났겠구나." 보케리아 시장의 하몽, 현란한 색상의 과일들, 앉고 싶지만 자리가 쉬 나지 않는 타파스집을 구경하느라 누가 스치는지도 몰랐는데. 아주 솜씨가 좋다. 그(그녀) 또한 이곳을 평생 직장으로, 그 짓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족속인가보다.
람블라스로드는 눈과 마음을 미혹케 하는 것들이 참 많다. 돌아가는 길 하늘로 '쀠위익' 소리를 내며 형광 물체가 날아오른다. 어둑해진 밤하늘로 날아오르니 참 보기 좋다. 3년 전엔 없던 것인데 호기심이 인다. 만약 어제 저녁 똑똑한 한국인 캠퍼가 주의를 주지 않았더라면 리씨네 가족 모두는 그것에 넋을 팔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 녀석들이 또 내 빈 반찬통을 확인했었겠지? 그렇다. 그것은 소매치기를 수월하게 하려고 그 녀석들이 관광객의 주의를 흩트리는 용도이기도 하단다.
이젠 더 없겠지 생각하며 거리의 시작 지점으로 거의 왔을 때 한 젊은 여자 애가 겉옷을 팔목에 걸치고는 딴 데 정신을 파는 내 남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다가가도 너무 다가갔다. 느낌이 좀 이상해서 가만히 봤다. 알고 보니 팔목에 걸친 겉옷은 자신의 손이 남의 가방, 지갑을 자유롭게 뒤지도록 커튼을 치는 용도였던 것이다. 어쩜 거리예술가들의 공연 창작 속도에 비하면 과히 소매치기 범들의 기술 개발 및 적용 속도는 LTE급이다. 초록색 겉옷의 용도의 참신함에 놀라울 뿐이다.
이곳은 나도 모르게 입이 헤~ ,가방이 헤~ ,지갑이 헤~ 벌어져 있지는 않은지 이성을 10분에 한 번씩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니다. LTE급 그네들의 속도를 생각하면 10분도 많다. 그러자면 아예 관광을 하지 말라는 뜻인데 어쩔까? 방법이 있다. 나처럼 빈 반찬통이나 넣고 다니자. 저절로 한국산 반찬통 홍보도 된다. 물론 실없는 말이다.
괜히 웃음이 새며 눈이 호사하는 사이 마음과 지갑을 빼앗기기에 가장 적합한 곳, 그곳은 단연 람블라스로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