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골 장터에서 발견한 '따순밥'
송준호
배부르고 등 따순 게 으뜸이라고 했다. 다들 춥고 배고팠던 시절 얘기다. 배고픔만 면해도 행복하다고 믿었다. 바로 엊그제 일 같기만 하다. 물론 요즘에도 우리 사회 도처에는 그 옛날처럼 춥고 배고픈 이들이 적지 않다. 이제는 적어도 그런 말을 직설화법으로 쓰는 일이 드물어졌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바로 그 시절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 고된 일상 속에서도 끝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게 하나 있다. 지아비와 자식들을 위해 당신 손으로 직접 '따순밥'을 짓는 일이었다. 무쇠 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장작불을 때야 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면서도 따순밥 짓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하는 어머니는 없었다. 어린 자식 입에 따순밥 들어가는 건 보기만 해도 속까지 다 '따순' 일이었다.
이러저런 이유로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마다 어머니들은 걸레질을 멈추고 한숨을 쉬면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야가, 밥은 제때 챙겨먹고 다니는지…." 그래서였을까. 어쩌다 전화연락이라도 닿으면 맨 먼저 안부를 묻는다는 게 고작 이랬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지?" 전화세 많이 나온다면서 통화를 서둘러 마치다가도 이렇게 당부하는 것 또한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챙겨먹어라."
명절을 쇠고 떠나는 자식들의 자동차 트렁크에 그 어머니들이 직접 농사를 지은 온갖 곡식이나 고추장, 된장 등속을 바리바리 챙겨서 실어 보내는 것 또한 끼니 거르지 않고 '따순밥' 잘 챙겨먹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겠는가.
'따뜻한 밥'은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간절한 소망이었다. 자식에게는 또 그게 보약이었다. 비탄민이 따로 없었다. 돌이켜보면 추억 자체였다.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귀하고 풍족한 삶'의 상징이기도 했다. '찬밥'은 당연히 그 반대였다. 오죽하면 남에게 괄시받고 소외된 사람이나 하찮게 취급받는 물건을 싸잡아서 '찬밥 신세'라고 했겠는가. 옛날에 걸인들이 자신을 한껏 낮춰서 얻어간 것도 '찬밥' 한 덩이였다. 월매도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사위에게는 찬밥을 먹였다. 그나마 향단이를 시켜서….
일본제 '코끼리밥통' 사건으로 온 나라가 한바탕 어수선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모 회사에서 만든 전기밥솥을 사들고 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런 풍경도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따순밥' 때문이다. 동북아 3개국의 윤택한 식생활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따순밥'인 것이다.
누가 뭐래도 밥은 따뜻한 게 으뜸이다. 무쇠솥에 쌀을 안치고 장작불을 때든, 돌솥에 가스불을 피우든, 잡곡의 종류에 따라 전기밥솥의 버튼을 눌러서든 방금 지어서 하얀 김이 피어나는 바로 그런 밥 말이다. 김밥이나 주먹밥, 초밥 등의 경우는 좀 다를 것 같지만 이 또한 새로 지은 '따순밥'을 알맞게 식혀서 써야 제맛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철에는 교실에서 조개탄이나 톱밥 난로에 '벤또'를 층층으로 쌓아서 밥을 데워 먹었다. 요즘에는 인스턴트 밥을 사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막 지은 것 같은 '따순밥'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길거리를 오가면서 사먹는 노량진 고시촌의 '컵밥'에도 온기는 있다. 그림처럼 '따순밥'을 파는 식당들도 어딜 가나 즐비하다.
그 어떤 따뜻한 밥인들 '집밥'만할까. 그 시절 어느날 저녁 끼니 때도 한참 지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집에 돌아오면 무쇠 솥에 지은 밥을 그릇에 따로 담아서 아랫목 이불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꺼내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순밥'에 비할 수 있을까.
불의의 사고로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들, 시시각각으로 억장이 무너지고 있다. 목숨 같은 자식의 환한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어서다. 그 귀한 새끼한테 더 이상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일 수 없어서다. 그 어머니들에게 이러저런 위로의 말을 건넨다지만 자식 낳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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