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사이렌 소리가... 어머니 집이잖아?

[공모-건망증 때문에 겪은 일] 전재산 집 한 채 건망증으로 날릴 뻔

등록 2014.05.12 16:30수정 2014.05.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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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늘어가는 것은 추억이지만 줄어드는 것 또한 그 추억의 기억입니다. 기억력이 점점 감퇴하는 것은 늙어가면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기억력이 감퇴하면서 조금 전에 했던 혹은 하려고 했던 일을 잊어 버리는 일명 '건망증' 증세를 우리네 부모님들은 흔히 겪고 있습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이 증세는 가벼운 에피소드로 우리가 즐겨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리모컨을 냉장고에서 찾는 일은 이제 별것 아닌 우스갯소리 정도로 넘기고 있습니다. 리모컨 정도의 물건을 잃어 버린다면 별것 아니지만, 휴대폰, 지갑, 심지어 손주를 데리고 외출했다가 잃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이 드신 부모님만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요.

불안 불안했던 어머니,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부엌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안방으로 가서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분명 무언가를 하려거나 가지러 오긴 왔는데 생각이 나질 않아 그냥 포기하시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전화기를 들었는데 누구한테 전화하려고 했는지, 약속한 날짜에 태평하게 다른 일을 하고 계시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런 저희 어머니의 증상을 알기에 항상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문 열고 다니지 말고 약은 꼭 챙겨 드시고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가스 불은 항상 끄고 다니시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또 잔소리한다며 작은 역정을 내시기도 하십니다. 뭐 이런 잔소리야 환갑이 넘고 칠순을 바라보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흔히 할 수 있는 잔소리가 아닐까요.

항상 불안 불안했던 저희 어머니께서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일 정도가 아닌 사달을 낼 뻔한 사고였으며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그런 일을 내신 겁니다.


때는 5월 2일. 평소와 다름없었던 금요일이었습니다. 같은 단지 내에 사시는 어머니는 아침이면 하나 있는 손녀를 돌봐 주시러 우리 집에 오셔서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오고 하십니다. 낮에는 비교적 자신의 시간을 가집니다. 일 주일에 세 번 구청 스포츠센터에서 수영하시는데 그런 날은 조금은 분주한 아침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평화로운 아침 시간답지 않게 단지 내에 시끌벅적하고 요란스런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 sxc


그날은 근로자의 날과 토요일 사이에 있는 징검다리 휴일이어서 아내는 집에서 아이와 함께 있었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는 돌볼 아이가 없으니 조금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을 보내며 수영장 갈 채비를 마친 후 여는 때처럼 수영장을 가셨습니다. 또 그날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저의 동생 집에 가기로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내는 미리 어머니와 시간 약속을 하고 수영을 마치는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고 합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요즘 날씨, 맞벌이하면서 고된 하루를 보내는 아내에게나 아침마다 손녀와 아옹다옹 실랑이를 하지 않고 넉넉한 오전을 보낸 어머니에게 평화로운 아침이었습니다. 아내는 어머니와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고 아이와 함께 기분 좋게 단지 내 아파트 사이를 지나 어머니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아침 시간답지 않게 단지 내에 시끌벅적하고 요란스런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한참 불자동차를 좋아하던 아이는 그런 소리가 마냥 신기한 듯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보자고 아내를 재촉했습니다. 아내 역시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발길을 빠르게 움직이는데 그 소리는 어머니 아파트로 갈수록 점점 뚜렷이 들려 왔습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소방차 5대가 어머니 집 앞에서 와 있었고 관계자 십여 명의 움직임이 분주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 소리와 광경이 도대체 어느 집 때문에 일어난 이유인지 궁금했고 점점 다가갈수록 아내의 궁금증은 불안감으로 변해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의 심증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역시나 하는 심증으로 굳어졌습니다.

어머니 집에서 검은 연기가... 머리가 혼미해졌습니다

어머니의 집은 1층입니다. 그 시간이면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비어 있었는데 바로 어머니의 집 부엌 쪽 세탁실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두 다리는 그 자리에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고 머리는 혼미해졌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두 눈앞에서 좁은 단지 내에 소방차 5대가 굉음을 내며 줄지어 서 있었던 것도 그렇고 소방호스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광경을 가까이서 본 아내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바로 어머니께 전화했습니다. 평소 전화를 잘 받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그때라고 잘 받으실 리 없었고 당연히 수차례 시도 끝에 통화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즉시 택시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셨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셨습니다. 그 사이 소방대원은 대문을 뜯고 들어가려다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세탁실 옆 고정 철창을 뜯고 방충망을 뜯고 진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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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가스레인지였습니다. ⓒ sxc


불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가스레인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그 평화롭던 오전 시간에 커피 한 잔을 하시려고 커피 물을 올려놓으셨고 옆에는 찌개를 데우려고 함께 올려놓았습니다. 때마침 전화를 하시면서 동네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시간이 되어 수영장 갈 준비를 하셨고 그 길로 문을 닫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스 불은 커피 물을 다 증발 시키고 찌개도 다 증발 시키다 못해 내용물까지 다 태워 버렸습니다. 연기가 일층 밖으로 스멀스멀 나왔고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가 경비아저씨께 알리고 119에 신고 후 즉시 출동했기에 천만다행으로 더는 불은 번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서민 부모님이 그렇듯 가진 것은 달랑 집이 전부이십니다. 자식들에게 용돈 받아 쓰시면서 집만큼은 어떻게든 보존하시겠다는 평소 어머니의 소신이 크셨던 만큼 소방차 5대와 집 밖에서 불이 난 집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결국, 심신안정제를 복용하신 후 누우셨습니다. 자신의 건망증으로 벌어진 일을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저는 "그러기에 평소에 내가 뭐랬냐고!" 어머니께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진정을 시켜드려야만 했습니다. 괜스레 자책하실까 걱정도 앞섰기에 말하기도 조심스러웠습니다. 대신 며칠 지난 후에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저희가 가스차단기 설치나 요즘 자동으로 차단되는 가스레인지로 교체해 드릴게요"라고 말이죠.

저도 이번 기회에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동시에 세 가지 일을 당당히 해내신 어머니는 슈퍼우먼이시고 멀티플레이어이십니다. 한 동네에 십여 년을 넘게 사시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친해지시는 사교성 높으신 분이십니다. 평생을 집 장만하시고 사신 분이십니다. 한순간 건망증이 도져서 일어난 사고로 일 주일이 지난 지금도 집안에는 콤콤한 냄새가 가시질 않네요.

저도 이번 기회에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잘못을 무조건 나무랄 것이 아니라 우선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진정을 시켜야 합니다. 심적으로 많이 위축돼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윽박지르면 그 사람은 더욱 자책하며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날 오후 어머니는 정신을 가다듬고 단지 옆 소방서로 감사의 표시라도 할 요량으로 찾아 가셨습니다.

어머니: 오전에는 정말 감사 했습니다. 이거 음료수라도 드세요.
소방서 아저씨: 누구신지요.
어머니: 아니 오전에 OO아파트 OO동 OOO호 불나서 오셨잖아요.
소방서 아저씨: 잠시만요 조회 해 보겠습니다... 아 여기가 아니고요 OOO소방서에서 출동 했습니다. 잘못 오셨네요.
어머니: 그래요?. 그럼 어쩐다... 이거 그냥 드세요..

당연히 가까운 소방서에서 출동했다고 생각을 하시고 가신 어머니는 뻘쭘해서 돌아오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때까지 정신이 혼미하셨나 봅니다. 만약 이 물건을 가져왔는데 왜 가져 왔는지를 모른다면 건망증이지만 이 물건을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경우 치매라는 말도 있으니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를 잘 구별해서 보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건망증 때문에 겪은 일 응모글
#건망증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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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평범한 한 아이의 아빠이자 시민입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우리 아이들은 조금 더 밝고 투명한 사회에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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