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차림' 탈출, 이준석 세월호 선장해경이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승무원들의 탈출 장면을 담은 영상을 지난 4월 28일 공개했다.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목포해경 소속 경비정 123정(100t급)의 한 직원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이 영상에는 승무원들이 제복을 벗고 123정에 허겁지겁 오르는 장면이 담겨 있다. 심지어 이준석 선장은 속옷 차림으로 세월호를 떠나 123정에 오르기도 했다. 뒤편에는 123정에 타고 있던 이형래 경사가 심하게 기운 갑판에 올라 구명벌을 펼치려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해경 영상 갈무리
남편이 말끝에 언급했던 1994년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에서 일어났던 참극의 전말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1994년 12월 8일, 중국 위구르족 자치구인 신장의 커라마이 시 교육국에서는 당일 상급 기관에서 파견, 시찰을 나오는 고위 관료들을 환영하기 위해 796명의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가무 공연을 준비했다. 동원된 학생들은 초·중학생들이었고 대부분이 위구르족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날, 가무 공연 도중 공연장 내에 화재가 발생해 323명이 죽었고, 132명은 심하게 다쳐 신체장애가 생겼다고 한다. 사망자 중 288명이 어린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비극은 '세월호 사건'과 아주 흡사했다. 대부분의 어린 학생들이 살 수도 있었던 그날의 화재는 먼저 탈출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뒤에 방치한 채 총총히 자신들만 안전 출구로 빠져나갔던 무책임하고 비양심적인 관료체제가 낳은 희대의 참사로 기억된다.
화재가 발생한 후 시 교육국 관료들이 가장 먼저 외쳤던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중국 관료 체제의 비상식적이고 부도덕한 측면을 풍자할 때 종종 회자되는 '유행어'다. 그날 화재가 난 직후 교육국 관료들은 "학생들은 움직이지 마! 높은 지도자들부터 먼저 나가게!"라는 '비상 지침'을 명령한 후 20명 이상의 '높은' 관료들을 먼저 안전하게 탈출시켰다.
그들이 탈출하고 난 뒤 불길은 이미 공연장 전체를 뒤덮었고 학생들이 탈출하려 했을 때는 여덟 개의 안전 출구 중 단 한 개만이 개방됐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나가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화재가 처음 발생했던 곳에서 학생들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관료들의 위치가 오히려 가장 가까웠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학생들부터 먼저 대피만시켰어도 수백 명의 어린 목숨들이 살 수도 있었는데 '지도자들부터 먼저 나가야 한다'는 지침을 듣고 그들이 다 나가기만을 기다리다가 모두 참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날 화재로 죽은 사람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전부였고 '높으신' 관료들은 머리카락 한 올 타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나왔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신장 커라마이 시에서 일어났던 그날의 비극은 아직도 현지인들에게는 삭혀지지 않는 분노와 치유되지 못한 상처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죽어갔는데도 시 정부나 중앙정부 차원에서 누구 하나 나서서 사과를 하거나 책임을 지는 관료들이 없었고, 사건의 책임을 물어 엄중하게 처벌된 관료도 없었다. 극소수의 관료들이 솜방망이식 처벌과 경고를 받았고, 그나마 몇 년 뒤에는 그들 모두가 이전보다 더 '높으신' 지도자로 승진했다.
20여 년 전 그 사건을 들려주던 남편이 내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면서 하는 말.
"근데 난 솔직히 이해가 안가. 중국이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관료 독재체제라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데 한국은 좀 다를 거라 생각했거든. 그래도 민주화 된 나라고 미국도 못 해본 여성 대통령을 뽑은 나라인데 말이야.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내가 낙하산 타고서라도..."라던 지도자, 한국 이야기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