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힘들기 때문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서평]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읽고

등록 2014.05.29 17:17수정 2014.05.2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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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농부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농부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에게 또한 위로가 되어야 한다. 농부는 고된 농사를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야 하니 위로가 필요하다. 그런데, 농사일의 고됨을 가장 잘 아는 농부들만이 농부를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농부는 생산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온갖 것들이 그의 노동에 대한 보답으로 만들어진다. 자연의 힘에 의해서 그렇다. 농부가 아닌 다른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답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들을 위로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받은 임금과 승진, 명예와 권력이 그들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창조된 그 무엇이 그들 노동의 보상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아직 위로를 받아야 한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좀 더 깊이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거의 오십 년을 자연과 멀어졌던 사람이 금방 자연에게서 깊은 사랑과 위로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라는 책을 통해 그에게서 위로를 구해야 한다.

벌레들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당하는 과일 나무들은 왜 그럴까. 마당 한 쪽에 심어 놓은 모과나무가 벌써 수년 동안 열매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쑥쑥 자라서 거의 3미터가 넘는 모과나무는 후손을 남기지 못할까.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건강한 모과를 우리에게 줄 것같은 믿음이 있다. 모진 공격을 받고도 해마다 끊임없이 가지와 잎을 새로 내어 서 있는 나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충제도 살균제도 비료도 주지 않고 막연히 기다리고 있다. <농부 철학자피에르 라비>

"나무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 냅니다. 그것들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입니다. 그러나 과일나무는 인간에게 길든 나무입니다. 가축이 야생 동물보다 더 약하듯, 과일나무에게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과일나무는 종종 벌레의 침입을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벌레들은 옛날에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곤충들은 자연의 헌병입니다. 벌레 먹은 나무는, 그 나무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열매를 맺더라도 그 종이 퇴화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곤충은 그러니까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생명을 재생산할 수 없는 개체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7쪽)"

몸과 마음으로 흙과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흙과 농토가 인간의 목숨과 똑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고, 허망하게 파괴되기도 한다는 것까지 전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름이 12000km가 넘는 지구가 불과 30cm 정도의 깊이 밖에 되지 않는 흙을 가진 농토로부터 70억 인구를 먹여 살리는 식량을 생산해 낸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이 아닐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농약과 제초제와 화학비료로 1m 도 안되는 땅을 오염시켰다고 해서 과연 문제가 될까. 흙 아래에는 적어도 50km가 넘는 거대한 두께의 암석층이 존재하기 때문에 농지는 언제나 교환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 거대한 지구는 정말 풍부한 곳이어서 언제든 대체와 교환이 가능한 상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지구를 합성된 무기 물질로만 생각하면서, 우리의 지구가 살아 있는 존재인 흙과 버섯 등의 여러 미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중략) 우리는 농부들에게 죽은 물질에 매달리지 말고 생명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68쪽)

"흙은 지표면 아래에만 존재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생산된 과일과 채소들이 예전의 향과 맛을 더 이상 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과일과 채소들은 여전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생명은 더 이상 없습니다." (69쪽)


농부로서 40여 년을 고단한 노동과 함께 하고 있는 피에르 라비는, 농사짓는 생활이 자리를 잡자 그의 고향인 알제리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충분한 농토가 있는데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바꿔보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도시인들과 권력자들, 시민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신감이다. 불과 4년 만에 망가진 농토와 농지를 떠난 농민들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농업분야는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나는 국회의원 자리를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조언자로서 4년 안에 알제리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91쪽)

농부에게는 얼마큼의 땅이 필요할까? 기자가 땅을 넓히려는 이유는 농사를 통해 소득을 창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 쌀과 채소와 기름과 장류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삶을 유지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땅을 좀 더 넓혀서 돈을 벌어보자는 것이다. 땅을 사지 않더라도 임대라도 해 보자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땅을 더욱 줄여서 최소한의 노동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족의 범위를 최소로 하면 지금의 절반 규모인 천 평 정도의 땅만 경작을 해도 지금 먹는 농작물들을 조달할 수 있다. 땅을 줄이면서 마련된 돈과 시간으로 생계와 문화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거름 구덩이 주위를 돌면서 당신은 그것들을 휘젓는다. 따뜻하게 덥혀진 거름들은 숨을 쉰다. 그 성분들은 부드러워지며 햇빛에 그을려 거무스름해진다. (중략)

농업이 산업화되면 농부들은 자급자족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 피에르 라비가 제안하는 '한 가정에 1헥타르'는 위험한 유토피아로 보일 수도 있다. (중략) 물론 1헥타르가 한 가족을 살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땅이면 적어도 한 가족에게 필요한 식량은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3쪽)

1헥타르(약 3천평)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산골 오지라도 1억 정도의 토지 구입비가 필요하고, 대도시 인근이라면 3억 정도의 목돈이 투자 되어야 한다. 시골로 사람들이 들어와서 자신의 식량을 생산하면서 땅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면 더 적은 돈으로 시골로의 이주가 가능해야 한다. 어차피 돈은 도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돈은 도시로부터 벌고 삶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좋다.

그러면 땅은 3백평이면 족하다. 집도 짓고 텃밭도 가꾸면서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 식량의 일부라도 그 땅에서 농사지어 먹기 시작한다면 삶의 태도는 많이 변화될 것이다. 힘들어서 텃밭 조차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농사에 재미가 붙어 점점 땅을 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농부들을 조금씩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시골 공동체에 사람들이 늘어나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최우선 과제다. 3백평에 1억이면 움직일만 하다. 도시형 일자리들도 사람이 늘어나면 점점 늘어나게 되어 새로운 산업이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피에르 라비 부부가 시골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는 약 50가구의 활기찬 경작지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밖에 없다. 그 지역에 있는 몇 가구 되지 않는 별장들이 그나마 그곳에 약간의 활기를 주기도 하지만, 그 활기는 가끔씩만 보일 뿐이다." (105쪽)

농부가 갖고 있는 이런 패기도 부럽다. 자연과 흙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나는 밭일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농부입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해서 밭을 일굴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맺고 있는 대지와의 관계가 매우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흙은 우리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고, 가뭄이나 많은 비, 엄동설한 등 날씨에 적응하게 합니다. 대지와 함께라면 절망이란 없습니다." (118쪽)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나무와 물을 가두는 저수지, 버려지는 축분을 모아서 만드는 퇴비가 피에르 라비의 해결책이었다. 커피와 땅콩, 목화를 위해 경작지는 다양성을 잃어 버리고, 숲은 사라져 갔으며, 기후 변화와 함께 물이 사라져 갔다. 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이 황무지를 농토로 만든 경험을 가진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나라는 정말 대단한 농업국가이다. 전국 어디를 가도 저수지가 있고 습지가 있으며 논을 만들어 쌀을 생산하려고 한다. 그 노력이 한반도의 지하에 물이 있게 하고 농업이 가능하게 한다.

"젊은이들과 함께 작은 둑을 쌓아 물을 막고, 물이 흙으로 스며들게 했다. 또한 여러 곳에 자갈과 진흙으로 소형댐을 건설했다. 그 댐들은 빗물이 떨어지는 대로 물이 모이게 했으며, 지하수층을 다시 채웠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오래전부터 메말라 있던 우물이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 들었다." (147쪽)

관광업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사업 중의 하나인데도, 보라카이를 비롯한 몇몇 아름다운 섬들이 대자본에 의한 관광업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하라의 오아시스에도 이미 이십 여 년 전에 시작된 문제였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잉여로 세상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어서 좋은데, 그로 인해 삶 자체가 위협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전에는 오아시스를 둘러싼 땅 가운데 곡식을 심을 수 있는 곳은 남겨 두고 집을 지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충당하기 위해 오아시스 안에까지도 건물을 짓는다. 또한 오아시스에 모여드는 여행자들은 늘 그곳에 부족하기만 한 귀중한 물을 낭비한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여행자 한 명이 하루 평균 200리터의 물을 소비한다." (164쪽)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제는 배부른 것들이다. 이미 생존의 단계를 뛰어넘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 문명의 안전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여러 가지 자유들이 제약되고 있기는 하지만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전쟁의 광풍과 군사독재의 칼날에서 벗어남으로써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분단 문제로 인해 핵과 전쟁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풍요롭다. 그래서 생긴 문제가 상대적 박탈감이다. 그런 문제는 분명히 심각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것들이지만 배부른 문제다. 제3세계의 생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뭔가를 하려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세상의 많은 나라에 존재하는 가난과, 갈비뼈가 튀어나온, 단지 죽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다짐합니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그리고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가 묻습니다. 잘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마침내 그 문제에 대해 몸과 마음을 기울여 일해야 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성입니다." (173쪽)

영원히 숙제인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일은 얼마나 하는 것이 좋을까? 피레르 라비는 이런 이야기로 답을 대신한다. 공감은 가지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망상과 같은 이야기다. 유머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농부들은 그 비료를 밭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매우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 부족에서 가장 지혜로운, 나이 들고 눈이 먼 추장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작년보다 두 배나 많은 양을 생산했어요.'  추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는 농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이들아, 매우 좋은 일이다. 내년에는 절반 크기의 밭에만 농사를 지어라' " (178쪽)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여 왔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였던 인간들은 기계 문명과 화학 문명의 발달로 자연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은 자연을 즐길 줄은 알아도 감사할 줄 모르는 교만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문명의 힘을 조금만 빼놓고 자연과 마주 서 보면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산업화 이전 시기에 연약한 인간들은 대자연의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위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만들었고, 신은 다시 그들에게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다. 인간들이 문명이라는 무기를 손에 넣기 전에는 단순히 위로가 되던 생각들이 이제는 직접적인 파괴를 합리화 시켜주는 핑계 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은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신을 통해 대리자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보호하고 가꾸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지, 지구를 착취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자연과 동물, 나무와 식물에 민감히 반응할 줄 알아야 종교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을 모든 것들의 위에 올려다 놓고, 우리 인간들에게 지구와 식물, 동물과 바다를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권리를 안겨 주는 선언들을 나는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중략) 기독교가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과 동식물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기독교는 인간을 지배자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그 결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200쪽)

농부인 피에르 라비가 자신이 짓는 농사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농업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농사는 퇴비를 이용한 유기농법이다. 비료나 농약,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의 힘으로 가족들의 식량을 생산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훌륭한가.

30대 초반의 은행원이나 공무원을 생각해 보자. 그는 시원하고 따뜻한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면서도 피에르 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린다. 당연히 식량을 비롯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은행원이나 공무원들은 20대를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피에르가 거둔 성과를 단번에 거둘 수가 있다. 결과는 비슷하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모든 개인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원과 공무원을 선택하고,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피에르를 선택하고,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스스로 피에르를 선택해서 뜨거운 햇살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다음 블로그 무일농원에 초고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2007


#무일농원 #무일 #피에르 라비 #농부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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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이 살아도 나태하지 않는다. 무일입니다. 과학을 공부하고, 시도 쓰며, 몸을 쓰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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