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금속노조 콜텍지회 이인근 지회장
최문선
8년째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사람들. 임재춘 조합원의 말처럼 농성자들은 서로에게 수다스럽지 않다. 그러나 무심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불편을 피하고 싶어서 그럴 때가 많다. 그것은 또 불신과는 다르다. 서로가 서로를 슬퍼하는 쪽에 더 가깝다. 여전히 동지인데, 여전히 남이기도 한 그 간격이 평행선으로 유지된다고 해야 할까. 상대의 슬픔도 너무 큰데, 내 슬픔을 꺼내버림으로써 공연히 슬픔을 보태주는 건 아닐까 겁낸다고 해야 할까.
임재춘 조합원의 말버릇 중 하나가 "아, 심심해~"이다. 또는 "아, 답답해!"이다. 그런데도 임재춘 조합원은 멍석을 깔아주면 말을 주저한다. 고민거리를 가지고 혼자 끙끙대다, 뒤늦게 다른 농성자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거야!"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거니 받거니 반복되었다.
이인근 지회장은 조합원들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고 답답해할 때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말대로 곧 결정이 되는 순간엔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알이 먼저인지 꿩이 먼저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수다 없는 그 고요함에는 관계와 관계들, 그리고 콜트-콜텍의 정리해고와 8년의 상호작용이 있다.
그 상호작용 속에 작년 10월 30일 새벽, 이인근 지회장은 홀로 차를 몰고 콜텍 본사로 가 자살을 시도했다. 8년의 요구가 담긴 현수막을 하나 걸어두고, 짤막한 유서 같지 않은 유서를 누군가에게 보낸 후 그는 떠나려 했다. 다행히 그의 행적은 우연의 덕과 묘한 예감 속에 빨리 알려졌다. 밧줄에 감겨 매달린 그의 몸뚱이를, 농성자들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으로 내렸다. 맥박이 뛰었고, 그는 입원 치료를 받았고, 작년 늦은 가을부터 올 봄까지는 목티를 입고 다녔다.
5월 19일부터 콜트-콜텍 해고자들은 대법원 앞에서 공정한 심리를 촉구하는 24시간 노숙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오늘(6월 3일) 대법원은 정리해고와 징계해고 무효 소송에 대한 최종 선고일을 알려왔다. 6월 12일 각각 오전 10시와 오후 2시. '심리불속행'은 아니라지만 불길하고 의심스런 빠른 선고.
이런 상황에서 임재춘 조합원은 자꾸 이인근 지회장이 눈에 밟히나 보다. 또 말하지 않고 행할까, 또 그 속에 무슨 슬픔이 자라나고 있지는 않을까….
선고가 어떻게 나오든 그들이 함께 싸우며 보낸 8년이 바로 기적 아니겠는가. 대법원 선고 후 인천 천막 농성장으로 돌아가면 조금은 작은 기적도 보여주길. 서로에게 먼저 말하고, 여유 있게 들어주는 기적. 못 마시는 술이라도 한 잔 받아놓고 귀 기울이는 기적.
임재춘 주방장이 식사 준비할 때 이인근 지회장도 나서서 거드는 기적. 각자의 핸드폰으로 게임 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기적. 그 대신 그 시간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유랑문화제 유인물도 접고, 집회 일정도 스스로 챙기는 기적. 회의 있을 때 각자 보고할 거 먼저 생각해보는 기적. 그 모든 기적 중에 한 개라도 이루어지는 아주 작은 기적. 그리고 오래 오래 살아가며 서로 지켜봐주는 더 큰 기적, 뭐 그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