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지방선거를 3일 앞둔 1일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도와주세요" 피켓을 들고 새누리당 지지를 호소했다.
남소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매한' 유권자를 탓해야 할까? 역시나, 여당과 보수교육계는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고 대통령 임명제로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국민이 교육감을 직접 고르는 게 문제라면, 영향력이 더 큰 대통령을 국민이 뽑는 건 괜찮을까?
지방선거 후 여권 인사들은 '국민들의 균형감각이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던 걸까?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선거날 정몽준 후보가 10%p 뒤진다는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은 정 후보가 '뻥도 쳤어야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서 의원은 "오페라 하우스와 같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하지 않은 것도 하고 뻥도 치고 했어야 한다"라며 "(정 후보는) 돈이 많아서 뻥을 쳐도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쩨쩨한" 박원순 후보에 비해 정몽준이 "큰 사람"인데도, 장점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그가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해 줬는지 모르나, 이제 '통큰 뻥'의 시대는 갔다고 보는 게 옳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 이후 국민들은 새로운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시절 청계천이라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어떻게든 안 할 이유를 찾기 바빴던 과거 정치인과 대조되는 뚝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췄다면 좋았을 것을, 그 브레이크 고장 난 불도저는 온 국토를 파헤치며 과거의 성과마저 스스로 깔아뭉개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 이후 '미니 이명박' 행세를 하던 정치인들은 하나 둘 참담한 종말을 맞았다. 오세훈이 그랬고, 나경원이 그랬으며, 이번 정몽준이 그랬다. 세빛둥둥섬, 뉴타운, 오페라하우스 등의 '통 큰 뻥'들은 "쩨쩨한" 무상급식, 노들섬 텃밭, '마을 만들기'에 뒤통수를 맞고 사라졌다. 박원순은 "일을 안 하는 시장"을 표방한 기이한 시장이었고, 그러고도 재선에 성공했다. 물론, "일을 안 하는 시장"이란 눈에 드러나는 업적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의미였고,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가치에 지지를 보냈다.
이런 현실에서 '뻥'을 주문하는 걸 보면, '킹메이커'라던 서청원 의원의 감이 많이 떨어진 게 틀림없다. 흐르는 세월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유신시절부터 칼날 같은 전략가 노릇을 하던 김기춘 비서실장을 보라. 두는 수마다 악수요, 고르는 인물마다 재앙이다. 이런 사람들을 '브레인'이라며 곁에 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도 참 딱하다.
과거의 구름 사이로 드러난 미래'보수'란 과거를 지키는 일이다. 이들은 지난 선거에서 "도와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내세우는 자기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무엇을 잘못했으며, 어떻게 바꾸겠다는 설명도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싹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럴 때 유권자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바꾸겠다'는 팻말을 든 채 과거의 행동을 답습하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을 뽑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여당은 살아남았다. 일부 유권자는 어떻게 여권이 심판 받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 이유로 좌절하기도 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변화에 대한 뚜렷한 저항이 드러났다. 저항보다는 '관성'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 특별히 변화를 거부했다기보다, 그저 지금까지 지지하던 정치세력을 지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겠습니다'궁금하지 않은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바꾸겠다'는 여권을 지지한 사람들이 새 내각의 인물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말이다. 아마 '별 생각 없다'일 것이다. 현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잘 하고 있다'고 믿는 40%는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해도 표를 바꾸지 않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다수는 정책적 판단보다는 개인적 호감에 근거해 대통령을 지지하는 경향을 지녔다. 이들은 여권이 '바꾸겠습니다'가 아니라 '절대 안 바꾸겠습니다'를 모토로 삼았어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을 것이다(오히려 지지도가 올라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를 조롱하려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에서는 누구든 지지할 권리가 있다), 상황이 암울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지난 선거가 '미지근한' 결과로 보였을지 모르나, 사실은 매우 뜨거운 변화와 관성적 지지가 충돌한 결과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선거 결과는 변화를 원하는 사람만으로도 사회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승덕 승리를 점친 까닭이번 선거가 주는 가장 큰 의미를 정리하자면, 한국사회를 보수적으로 지탱해 온 이념의 최면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다른 분야로 빠르게 퍼져갈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교육분야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면, 어느 분야에도 일어날 수 있다.
나는 한국사회의 교육열이 정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물론 국민 개인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기를 포기한 채, 단편적이고 소모적인 지식경쟁의 정글 속으로 학생들을 몰아넣는 비정상적인 사회상황 때문이다. 교육열이 비정상일 때, 교육 지도자를 고르는 안목이 정상이기는 어렵다. 내가 고승덕을 승자로 예측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교육과 관련해 식견이나 경험을 거의 갖지 못한 법률가 출신이다. 하지만 '고시 3관왕'이라는 칭호는 그를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 주었고, 그는 이 인기를 타고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고시 3관왕'이 존경 받아야 할 이유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모두가 알듯, 고등고시는 '지식 탐구'와는 거리가 있는 채용시험이다. '고시 3관왕'이 많지 않은 이유는, 시험이 어렵다는 이유 이외에도 각각의 시험이 대단히 소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시는 꽤 많은 시간과 정력, 그리고 금전적 여유를 요구한다. 그런 탓에, 자기가 목표로 하는 분야의 시험에 최대한 빨리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법률가가 꿈인 사람이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까닭은, 요리사를 꿈꾸는 사람이 중장비 자격증에 열망을 품지 않는 이유와 같다.
재학중 고시를 세 개나 봤다는 것은, 대학생활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지 못했음을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 제자가 유사한 선택을 하려 한다면, 나는 교육자로서 적극 말릴 것이다. 물론, 시험능력과 운을 시험해 본다는 가치는 있을지 모르나, 스스로 자랑하거나 남이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고 후보가 교육감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를 나열한 것 같다. 이러면서 그의 당선을 점쳤다고? 그렇다. 고승덕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한 시점부터, 나는 그 결과가 뒤집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배움의 기쁨과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 교육이 취업 수단으로 전락하고, 9급 공무원이 초등학생들의 '꿈'이 된 사회에서 '시험왕'은 한국 교육수장의 더 없는 미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3자 효과'에 도사린 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