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증' 전인권도 박민규 소설은 읽는다?

카리스마 가수와 은둔형(?) 소설가가 친구가 된 사연

등록 2014.06.23 20:36수정 2014.06.2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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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규 소설집 <더블>을 훑어보는 가수 전인권.
박민규 소설집 <더블>을 훑어보는 가수 전인권.온북TV
"네. 그렇군요. 소설가 박민규가 전인권을 그만큼 좋아하는군요..."
"아뇨. 이젠 내가 박민규를 더 좋아합니다."

파격적이었다. 록그룹 들국화의 보컬 전인권(60). 그가 46살이던 2000년, <오마이뉴스> 열린 인터뷰를 시작으로 그간 4~5번 정도 인터뷰를 했고, 강원도 춘천교도소에 수감 중일 땐 면회를 갔으며, 2~3번에 걸쳐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함께했다.


그 적지 않은 만남에서 나는 전인권이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그는 우리가 상상하던 것처럼 '길들여 지지 않는 사자'였고, '마초형의 사나이'였으며, '간지러운 말을 못하는 직설가'였다. 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무한복제된 예쁘장한 걸 그룹이나 보이 밴드와는 그 격을 달리하는.

허나,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세월 탓일까? 가장 최근에 만난 전인권은 뾰족한 모서리가 자연스러운 풍화로 깎여나간 부드러운 돌처럼 변해 있었다. 지난주 문화계의 리더로서 온북TV '오봉옥 시인의 책치' 녹화장을 찾은 전인권은 박민규도 모자라 또 한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 그 이야기는 마지막에.

아우라 가수와 숨어 사는(?) 소설가의 만남

10대 후반에 노래를 시작해 앞서 언급한 들국화의 보컬로서는 물론, '전인권'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한국 가요사'의 부정할 수 없는 우뚝한 산맥으로 자리를 지킨 전인권. 그가 14살이나 아래인 조카뻘의 소설가 박민규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야기는 몇 년 전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인권은 대마관리법 위반을 비롯한 마약 전과 5범. 이는 스스로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바다. 그가 4번째로 수감됐을 때다. 가족 면회 시간에 아내 대신 생면부지의 낯선 사내가 면회실로 불쑥 들어왔다. 그가 바로 소설가 박민규. 아래는 전인권이 기억하는 당시 둘의 대화다.


"누구세요?"
"저는 글을 쓰는 박민규라는 사람인데요."
"그런데 왜...?"
"형님, 걱정말고 건강만 챙기세요. 제가 책임지고 소설가들의 석방탄원서를 받아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박민규가 발품팔며 받아온 문인들의 석방탄원서 수백 장은 재판부의 '전인권 석방 결정'에 작지 않은 이유가 됐을 듯하다.


사실 박민규는 그가 써온 유쾌하고 재기 넘치는 소설과는 달리 외향적이기보단 내성적인 쪽에 가까운 작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 발표 후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J. D. 샐린저처럼 '은둔형 작가'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전인권의 일에는 스스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섰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본 검토를 하고 있는 전인권.
대본 검토를 하고 있는 전인권.온북TV

'우리' 대신해 '그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주었던 전인권

정통성과 도덕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198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목청을 다해 노래하거나, 외치는 걸 두려워했다. 바로 그때 들국화와 전인권은 그 '두려운 대중'을 대신해 듣는 것만으로도 피가 뜨거워지는 '야수의 목소리'로 부정한 세상을 향해 고함을 질러줬다.

박민규를 포함해 음악과 '인간다운 삶'을 꿈꿨던 지금 40~50대 누구라도 그룹 들국화와 전인권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박민규는 바로 그 부채의 상환을 위해 그날, 전인권이 갇힌 구치소의 면회실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

이날 전인권은 자신의 재판에서 수차례 진술서와 조서를 반복해 읽으며 '난독증'에 걸려 책을 거의 읽지 못한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다른 책은 안 읽어도 박민규가 보내온 책만은 읽으려고 노력한다는 걸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바로 그 전인권이 최근 가장 재밌게 읽었다는 책은 박민규 소설집 <더블>(창비).

1968년생 박민규는 한겨레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의 수상자이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카스테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의 작품을 통해 이전 한국소설 스타일과는 변별되는 재기 넘치는 문장과 독특한 세계인식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이 부정할진 모르지만 언필칭 '스타작가' 중 한 명.

 전인권이 흥미롭게 읽었다는 박민규 소설집 <더블>.
전인권이 흥미롭게 읽었다는 박민규 소설집 <더블>.창비
그가 쓴 <더블> 역시 표지부터가 '확 깨는' 파격으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거기에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B급 문화코드가 어우러진 소설집. 전인권은 낭독 순서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더블>의 '백미'로 꼽으며, 직접 책의 한 대목을 읽는 '보기 드문 모습'도 선보였다.

"...언뜻, 그렇다 나도 언뜻 이곳에 머물렀지 않았던가. 지긋이 책을 집어 들면서도 마치 죽은 이처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빗줄기가 그리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무수한 연잎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간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또 뭐라고 애길 했을까.

책을 펼치자 한 장의 사진이 깃들어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오래 그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

어째서 전인권이 단편이 18개나 실린 <더블>에서 이 한 대목을 지목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왜냐? 독자들의 판단 영역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수 전인권과 '할아버지' 전인권의 모습 고스란히 보여줘

마지막. 앞서 '전인권이 사랑을 고백한 두 번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다름 아닌 전인권의 외손녀. '카리스마 넘치는 가왕(歌王) 전인권'이 아닌, '할아버지 전인권'은 "손녀딸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보고 있으면 그 맛까지도 함께 느껴지는 것 같다"란 말로 보통의 할아버지와 다름없는 손녀 사랑을 과시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따뜻했다.

전인권과 박민규의 특별한 우정을 비롯, 들국화와 전인권의 인생 이야기, 음악 이야기까지가 담긴 '오봉옥 시인의 책치-전인권 편'은 24일 오후 10시 온북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기사를 쓴 홍성식은 '오봉옥 시인의 책치' 대본을 쓰고 있습니다.
#전인권 #박민규 #온북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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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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