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회] 이 퉁소의 주인공이 그라는 걸 어찌 알았나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57회] 자운헌(2)

등록 2014.06.26 10:18수정 2014.06.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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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장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황인규

담곤이 서실의 한쪽 벽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다기(茶器)를 집어들었다. 혁련지가 재빨리 다가가 다기를 건네받고는 관조운에게 찻주전자를 내밀었다. 관조운이 물을 담아오자 혁련지는 화로에 불을 지폈다. 다향(茶香)이 실내에 퍼졌다.  


"오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사형께서 임종 순간에 관 사질에게 남긴 말씀이 나를 지칭했다면, 이곳 자운헌을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때 사형이 이곳을 떠나면서 문집을 하나 남겨놓고 간다고 하셨는데, 눈에 보이지 않아 나도 잊고 있었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문집에 실마리가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말을 하던 중 담곤이 길쭉한 물건을 허리춤에서 꺼냈다. 이번 여행 동안 한시도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기물이다. 그가 비단 주머니를 열자 안에서 퉁소가 나왔다. 담곤이 잠시 퉁소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이상한 일이 내게 있었어. 다른 사람에겐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내겐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지. 한 달하고도 달포 전 쯤 물건이 하나 배달되었는데 내 앞으로 친전(親展)이 돼 있어 총관사가 나한테 직접 가지고 왔다네. 겉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 누가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아 개봉을 했지. 열고 보니 안에 퉁소가 들어있지 뭔가. 이상하다 여기면서 누가 왜 보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보관만 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오른 거야. 혹시 셋째 사형의 퉁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거지. 확인해보니 셋째 사형의 것이 틀림없었어.

강호의 은원을 잊고 서호에서 고기나 잡으며 평화롭게 지내던 사형께서 이 물건을 왜 갑자기 나한테 보냈을까, 게다가 아무런 표식도 없이, 하는 의문에 잠겨 있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사형이 보낸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들더군. 만약 셋째 사형이 나한테 보냈다면 짧은 편지라도 적었을 텐데 아무런 전언도 없이 불쑥 퉁소만 나에게 전했다는 건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복주(福州: 지금의 복건성 지역)로 표행하는 표사에게 오른 길에 서호에 들려서 알아봐주길 부탁했었지."

"퉁소가 셋째 사숙님의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혁련지가 끼어들어 물었다.

"스승님께선 네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각자에게 한 가지씩 선물을 주셨다네. 그중 셋째 사형에게 하사하신 게 바로 퉁소였지. 네 제자가 시차를 두고 각기 떠났기 때문에 선물의 내용이 무언지 한동안은 서로 몰랐었지.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서 스승님의 선물을 언급하는 게 왠지 모르게 금기가 돼 있었어. 그래서 나도 내 손에 들어온 퉁소가 혹시 셋째 사형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게지. 그러다 문득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어.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해. 스승님이 제자들에게 내린 선물에는 율시(律詩)와 요결(要訣)이 각각 한 구절 씩 적혀 있으니까. 퉁소는 대나무를 세로로 잘라 아교로 붙이고 가죽끈으로 묶은 것이니, 이들을 분해해 보면 알 수 있었어. 과연 대나무 안쪽에 시와 요결이 적혀 있더군."


담곤이 퉁소를 들어 가죽끈을 풀었다. 퉁소는 네 개의 세로 조각으로 나뉘었다. 분해를 한 다음 아교로 붙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과연 그중 마주보는 두 조각에 각각 한 구절 씩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중 하나에 '開眞煉形(개진연형) 形熟歸無(형숙귀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아니, 이 구절은?"

관조운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왜? 관 사질이 아는 구절인가?"

담곤이 물었다.

"은화사에서 저를 취조하던 자가 물어보았던 것이 바로 이 구절였습니다."

"뭣이? 은화사에서……. 그자들이 어떻게 셋째 사형 퉁소 안에 적혀 있는 문구를 알 수 있었을까……."

내뱉듯 말을 던진 담곤은 입을 꽉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은화사에서 사형에게 물어본 게 이 구절의 의미를 물었던 거예요? 아니면 이 구절의 출처를 물은 건가요?"

혁련지가 관조운에게 물었다.

"글쎄, 그게 확실치 않아. 얼핏 들으면 이 구절의 의미를 아냐고 물은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 구절을 알고 있다면 어디서 들었냐고 물은 것 같기도 한데, 중요한 건 내가 그 둘 다 모른다는 거지."
"모른다니까 그들이 뭐래요?"
"별 다른 반응은 없었어. 그다지 닦달하지도 않았고, 혹시나 내가 아는가 싶어서 물어봤다는 느낌이랄까."

"그들이 다른 구절을 언급하진 않던가?"
담곤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없었습니다. 사숙 어른."
"음……."
"사숙 어른께서는 그 구절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혁련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전에 먼저 보여줄 게 있어."

담곤이 일어나더니 장검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갔다. 장검 밑에는 다리가 긴 장식용 탁자가 있고 그 위에 하얀 도자기가 놓여 있다. 담곤은 도자기를 조심스레 들어 가져왔다. 한 자 높이의 자기(瓷器) 문병(文甁)이다. 길쭉이 솟은 전(顚) 아래로 여인이 살짝 몸을 틀 듯 곡선이 흘려 내려 고아한 품격이 우러났다. 백자(白磁)에 청화(靑華)로 문양을 새겼는데 흔한 당초문이 아니라 소나무에 가지에 달이 걸쳐 있고 그 옆에 구름 한 조각이 걸려 있다. 그림의 왼편에 칠언율시로 보이는 시구 하나가 적혀 있고 오른편에 요결인 듯한 구절이 있다.

자기를 바라보던 혁련지가 가볍게 탄성을 내지르듯 말했다.

"아니, 이 그림은 사숙님을 상징하는 내용 아닙니까?"

담곤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스승님께서 나에게 주신 작별 선물이지. 거기 뭐라고 적혀 있나?"
"凝神生虛(응신생허) 虛玄通化(허현통화)."

관조운이 읽었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소질, 문자 그대로의 훈(訓)과 독(讀)을 따르는 건 어렵지 않으나, 여기엔 반드시 깊은 의미가 있을 터인데 그것까진 모르겠사옵니다."

"그럴 것이네. 스승님께서 네 제자에게 작별 선물로 내린 기물에는 이처럼 각각의 시구와 요결이 하나씩 적혀 있었어.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요결에 대해서 어느 제자에게도 그 의미를 설명해주진 않았다네. 제자들 스스로 이 구절이 무극진경의 요체(要諦)를 나타낸 구절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지."

"왼편의 율시는 어떤 시입니까?"

관조운이 물었다.

"스승님이 네 제자를 생각하며(思四弟子) 손수 지으신 건데, 각각의 기물에 한 구절 씩 적혀 있다고 알고 있네. 스승님이 운명하신 후 네 제자가 다 모인 적이 없으니 이 율시 또한 전문(全文)을 알 순 없지만, 제자를 생각하는 스승님의 마음이 담겨 있으리라는 건 굳이 맞춰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네."

담곤은 여기까지 말하고 율시 칠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나지막이 읖조렸다.

복숭아꽃 피는 계절에 제자들이 모일 것을 청하노니 (桃花時節 請弟會)
강호의 은원일랑 잊고 털어냄이 어떨까 (江湖恩怨 何盡忘)

"진인께서는 제자들에게 강호의 일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은일자적(隱逸自適)을 권하시는 것 같군요?"

관조운이 말했다.

"그렇다면 전행(前行)의 말구(末句)에서 제자들이 모일 것을 청하는(請弟會) 건 무얼 의미할까요, 사형?"

혁련지가 물었다.

"그건 앞구(初句)에서 복숭아꽃이 피는 계절(桃花時節)이 상징하는 걸 전제로 한 것이지. 예로부터 도화시절(桃花時節) 혹은 도원경(桃源境)은 평화롭고 이상적인 곳을 나타내니 이 시에서는 호시절을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즉 강호의 은원이 잊힐 정도로 평화로운 시절에 제자들이 만날 것을 권한 것인데, 강호에 언제 은원이 사라지고 소란이 그친 적이 있었던가. 그런즉 이 구절은 현실의 반어법으로 쓰여 은원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은일과 자적을 권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야. 사매."

"그럼, 셋째 사숙 어른의 퉁소에 새겨진 시구와 같이 살펴보죠."

혁련지가 퉁소 조각을 들어 안쪽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떨어지는 물을 맞던 교룡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蛟龍落水 飛昇天)
하늘을 우러러 술잔을 높이 들면 만년의 정이 쌓이나니 (仰天揮酒 萬年情)

"만약 사대제자들의 순서대로 연이 전개된다면, 이 구절은 3연이 되겠군. 기승전결(起承轉結) 구조의 전(轉)에 해당할 것이고. 앞의 두 연이 어떤 식으로 전개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3연에서 교룡이 하늘로 오른다는 게 전(轉)이라고 보면 앞의 두 연에서는 고요하고 고답적인 시상(詩想)이 전제되지 않았을까 싶어. 그러니까 3연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강호에 이름을 떨치더라도 4연의 결(結)에서는 네 제자가 소박한 우애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아닐까."

관조운의 유장한 설(說)에 혁련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듣고 있다.
이런 남녀를 담곤은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월, 목 연재합니다
#무위도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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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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