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나에게 외친다 "깨어 있으라"고

[길을 걷다 만난 풍경 ⑭]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서어나무숲과 천년송 '볼만'

등록 2014.07.01 18:13수정 2014.07.0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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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 9번째 마을(행정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아름다운 서어나무숲.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 9번째 마을(행정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아름다운 서어나무숲. ⓒ 박주현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어딜 갈까, 망설이는 분들이 있다면 올해는 태고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지리산행을 권하고 싶다. 차를 타고 노고단이나 정령치를 단숨에 오르는 것보다 수십여 갈래 길로 이어진 둘레길을 천천히 걸으며 세상을 잠시 비켜나 내 안의 나를 찾아 잠심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자연이건, 세상사건 좀 더 알고, 점 더 깨어있을수록 그 대상은 새로운 존재로 다가오기 마련. 지리산 둘레길에 대해 정보를 알고 떠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20여 마을 잇는 지리산 둘레길, 볼거리 '풍성'  

a  마을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서어나무숲.

마을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서어나무숲. ⓒ 박주현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북, 전남, 경남)와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74km의 장거리 도보길로 20여 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둘레길은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으로 연결해 놓아 눈요깃거리가 풍부하다. 

지리산 둘레길 어딘들 볼거리가 없으랴만, 초입인 제 1구간(남원시 주천면에서 운봉읍을 잇는 구간)에서부터 볼거리가 많다. 지리산 첫 관문이라고 무시하며 주마간산 격으로 걷다간 놓치기 쉬운 곳들이 있다. 그 중 제1구간을 잇는 10개 마을 중 9번째에 위치한 운봉읍 행정리는 서어나무숲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서어나무숲이 반겨준다. 세월의 이끼와 겹겹이 에워 쌓인 울퉁불퉁한 회색 수피(나무껍질)들, 나뭇잎과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하늘을 온통 초록색으로 수놓아 신비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서어나무숲, 정신적·육체적 힐링장소 '으뜸'


a  서어나무 수피(나무껍질)는 회색이지만 초록잎과 잘 어울린다.

서어나무 수피(나무껍질)는 회색이지만 초록잎과 잘 어울린다. ⓒ 박주현


아름답고 신비한 이곳 서어나무숲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 덕지덕지 붙은 세상의 속기가 한 줌 한 줌 벗겨져 나가는 것만 같다. 서어나무숲은 주민들이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200여 년 전 조성한 숲으로 마을을 지켜주는 비보림(裨補林, 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이다.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와 주민들의 쉼터로, 아이들과 새들의 놀이터로 소중하게 자리 잡은 서어나무숲은 마을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생태적 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동쪽으로는 바래봉과 남쪽으로 정령치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1600평방미터에 달하는 서어나무숲은 정신적․육체적 힐링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제격이다.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서어나무는 낙엽교목으로 키가 15미터까지 자랄 수 있는 큰 나무다. 이곳 서어나무 숲을 지키는 나무들도 얼추 10미터는 넘어 보인다. 

서어나무 잎은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들이 있는 게 특징이다. 잎은 10~12쌍의 맥이 나란히 나 있으며 꽃은 잎이 나오기 전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한 나무에 핀다.

작열하는 뙤약볕을 비껴 선 서어나무숲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부엽토로 쌓인 낙엽의 더미 속에선 한줌 생명의 온기를 불러 모으느라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핍진한 세속에 두고 온 나, 숲에 없는 듯 '고요'

a  초록빛으로 하늘을 가린 서어나무숲.

초록빛으로 하늘을 가린 서어나무숲. ⓒ 박주현


숲에 들어서자마자 서어나무들은 시원한 바람을 내주며 소리 없이 반겨준다. 핍진한 세속에 두고 온 나는 이미 이 숲에는 없는 듯 고요하다. 마치 시간이 멈춰선 듯. 그러더니 이내 내 안의 나에게 화두를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우리를 향해, 나를 향해 어떻게 열려 있는가?'

a  시원한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서어나무숲 쉼터.

시원한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서어나무숲 쉼터. ⓒ 박주현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서어나무숲에 몸과 마음을 맡긴 후 떠나오기 전 다시 바라본 서어나무들은 한줌 시원한 바람을 다시 내주며 잘 가라고 잎들이 환하게 웃으며 살랑살랑 인사를 고한다.  

"이 서어나무숲은 후세에 물려줄 귀중한 자연유산으로 다음사항을 꼭 지켜주기 바랍니다. 쓰레기 되가져가기, 이륜차 및 차량진입 금지, 음식반입 및 취사금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비보림, 후세에 그대로 물려주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숲 입구 간판에 적혀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된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져 되레 불편하고 불안하다"고 말한다. 간혹 흔적을 남기고 가기 때문이다.     

천년 적송들, 팔을 쭉 뻗어 금세라도 반갑게 끌어안을 듯

a  삼산마을 입구에 서서 세월의 풍우에 맞서고 있는 적송들.

삼산마을 입구에 서서 세월의 풍우에 맞서고 있는 적송들. ⓒ 박주현


신비하고 고요한 서어나무숲을 뒤로 하고 약 500미터 동쪽으로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100여 그루의 천년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장관을 마주하게 된다. 천년 세월을 지켜온 적송들이 팔을 쭉 뻗어 금세라도 반갑게 끌어안을 태세다.

a   천년 세월을 지켜온 소나무들이 팔을 쭉 뻗어 금세라도 반갑게 끌어안을 태세다.

천년 세월을 지켜온 소나무들이 팔을 쭉 뻗어 금세라도 반갑게 끌어안을 태세다. ⓒ 박주현


행정마을 바로 옆 마을인 삼산마을 입구에 서서 세월의 풍우에 맞서고 있는 적송들은 마을의 안녕과 복을 가져다주는 수호신답게 경이로움이 나무 곳곳에 가득 배어있다.   

삼산마을은 그 유래가 재미있다. 고려 말 양씨, 김씨, 이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며, 마을 동쪽에 세 개의 작은 봉우리가 있어 삼태봉, 삼태산이라고도 불러왔다.

a  마을의 안녕과 복을 가져다주는 수호신, 천년 적송.

마을의 안녕과 복을 가져다주는 수호신, 천년 적송. ⓒ 박주현


특히 삼산마을에는 100여 그루의 천년송이 군락을 이루고 마을 안길 사이사이로 샛강이 흐르며 돌담장으로 만들어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깨어 있는 지리산, "영혼이여 깨어 있어라" 일침

a  정령치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천왕봉. 마치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것 같다.

정령치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천왕봉. 마치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것 같다. ⓒ 박주현


a  천왕봉 반대편에는 행정마을 서어나무숲과 삼신마을 천년 적송들이 구불구불 지나온 길의 끝자락에 아련히 펼쳐져 있다.

천왕봉 반대편에는 행정마을 서어나무숲과 삼신마을 천년 적송들이 구불구불 지나온 길의 끝자락에 아련히 펼쳐져 있다. ⓒ 박주현


말 없는 소나무들은 마을의 희로애락과 늘 함께 하며 인간들의 숱한 고뇌와 번민을 다독이며 어루만져 왔으리라. 저 고목들처럼 세상일에 초연하며 부는 바람대로 살 수 있다면. 문득 길게 휘어진 적송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흡사 인생사의 행불행과 닮았다.

이곳에서 정령치 정상까지는 반나절 가량을 걸어야 하는 거리지만 새벽의 고요를 떨치고 밝아 오는 정령치에서 바라본 천왕봉은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것 같다. 천왕봉 반대편에는 행정마을 서어나무숲과 삼산마을 천년 적송들이 구불구불 지나온 길의 끝자락에 아련히 펼쳐져 있다.

a  지리산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지리산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 박주현


태고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 속에서 불현듯 잠자는 마음을 흔들어 일깨워 주는 기운이 느껴진다. 불의한 세력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리라. 태고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곳, 시계바늘이 멈추어 선 것처럼 보이지만 쉼 없이 깨어 있는 자연 속에서 '깨어 있어라'란 교훈을 또 한 번 얻어 간다.

'영혼이여 깨어 있어라. 의식이여 날 선 사금파리처럼 열려 있어라.'
#지리산 둘레길 #서어나무숲 #처년 소나무 #정령치 #행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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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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