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원밥 먹을 때 쓰는 2400원이 아깝다. 내가 밥값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이자민
2400원짜리 밥을 먹어가며 쓰는 '자소설'나는 오늘도 도서관에 간다. 신문을 훑으며 상식 시험에 나올 만한 시사 용어를 정리한다. 정치·사회·국제 그리고 스포츠면까지 종이를 넘기다가 시선이 멈춘다. <독거 노인을 위한 봉사활동 중인 김연아>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4년 전에 세계 1위를 차지한 그녀를 보고 "참 대단한 선수다"하며 감탄하다가 문득 그녀가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임을 깨닫는다. 나는 다시 초라해진다.
노트북을 켜고 '시청률'을 검색한다. 오후 10시에 방영하는 드라마들의 시청률 추이를 비교한다. 초반 4회까지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점점 하락하는 어떤 드라마의 시청률이 꼭 내 심리 상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할 수 있을 거라고, 합격할 거라고 억지로 용기를 내보지만 결국 곧 추락하고 마는 나를 보는 것 같다.
모니터링을 위해 다운 받아 둔 드라마를 재생한다. 왼손은 스페이스바 위에, 오른손은 노트 위에 두고 매서운 눈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앵글은 자연스러운지, 음향은 어떤지, 조명은 무슨 기법이 쓰였는지 집중하다 보면 스토리는 뒷전이다. 뒤로 돌려 앞 부분부터 다시 보기 시작한다. 화면 속 주인공은 슬퍼서 울기도 하고 행복해서 웃기도 하지만 정작 드라마를 보는 나는 60분 내내 표정이 없다.
오전 11시께 학생식당으로 간다. 굳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점심치고는 이른 시간에 가는 편이 낫다. 반짝반짝 재잘대는 어린 후배들을 피하고 싶다. "2400원입니다"는 직원의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내가 오늘 아침에 2400원어치 밥값을 했던가"라고 생각하며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는다. 미지근한 국을 한 술 뜨며 휴대폰으로 아르바이트 정보 사이트에 접속한다. 지난 3월, 반 년 넘게 해오던 아르바이트를 잘리고서 여태 '즐겨찾는 목록' 1순위에 자리하고 있는 사이트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도서관 앞 벤치에 잠시 앉는다. 휴대폰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쭉 훑는다. 페이스북 계정은 비활성화했다. SNS상의 친구들 이야기를 보기 싫어서다. 유학을 간 이야기, 유럽 여행을 떠난 이야기, 오늘 무엇을 먹었고 뭘 하며 놀았는가에 대한 행복하고 밝은 이야기들이 싫었다. 그런 글들이 타임라인에 올라오면 나의 비참함이 더 부각됐다. 자꾸만 주변 인물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페이스북을 접었다. 하지만 외롭다. 그나마 SNS로 갈증을 해소하던 관계마저 끊기니 사람이 그리웠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고민 끝에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잘 지내냐", "오랜만이다", "뭐 하고 사냐"와 같은 시덥잖은 말이 몇 마디 오고 간다. "아직도 PD, 그거 준비하냐?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부모님 그만 고생시키고 적당한 데 취업이나 해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커피의 텁텁한 끝 맛이 오늘따라 더 강하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노트를 펼친다. 어제 오후에 있었던 작문 스터디에서 무지막지하게 '까인' 내 글을 본다. 색색의 펜으로 이리저리 난도질 당해 너덜너덜해진 글. "너도 나와 비슷하구나" 괜시리 울컥 한다.
책상에 앉은 지 7시간째, 허리가 뻐근하다. 잠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양심상 벌써 집에 갈 수는 없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주변을 살핀다. 내 앞자리 사람은 형법을 공부하고, 내 옆자리 사람은 CPA 책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소설책을 읽는다. 공부할 과목과 분량이 정해진 저들이 부럽다. 저들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신문 읽고, 드라마 보고, 소설책 읽는 나를 한량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 케이블 채널에 제출할 자기소개서를 마무리한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마음만 조급하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용기있게 문제를 해결했던 일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이었던 일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공부만 하고 살라더니, 이제는 왜 공부만 하고 살았냐며 나를 콕콕 찌른다. 전부 나와는 별 관계 없는 질문들이다. 사소했던 기억의 한 조각까지 끄집어내 부풀리고 또 부풀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 이렇게 창의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뽑아주세요'라고 자소설(자기소개서+소설)을 써 본다.
학 옆의 볼품 없는 닭같은 나, 하지만 아직 포기 못해'카톡'하는 소리에 무심결에 핸드폰을 본다.
"야, 너 오늘은 나올 거지?" 맞다. 친한 동기의 취직 축하 술자리가 오늘이었다. 축하를 위한 기쁜 모임이지만 돈도, 시간도, 여유도 없는 나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다. 그래도 비슷한 모임을 세 번이나 거절했으니 이번에는 나가 줘야 한다. 대충 머릿속으로 술값을 계산해 본다. 지갑을 열어 남은 돈을 확인하고, 앞으로 써야 할 생활비까지 정리한 후에야 "그래, 좀 있다 보자"라고 답장한다. 오늘 목표치를 다 공부하지 못해 불안하다. "어차피 매일이 불안의 연속인데 술 한 잔 정도로 뭐가 달라지겠냐"며 애써 죄책감을 무시한다.
같이 PD를 준비하다 결국 사기업에 합격한 친구다. "부럽지만, 부럽지 않아"라고 스스로 되뇌어 본다. 나는 아직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에 고고한 학이 된 마냥 몸을 꼿꼿이 세워본다. 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다.
하지만 친구의 합격 이야기, 입사 전 여행 이야기, 연수원 이야기에 어깨가 위축되고, 나는 학은커녕 볼품 없는 닭이 된다. 1년에 한 번도 잘 뜨지 않는 방송국 공채, 그 중에서도 겨우 3명 뽑으면 많이 뽑는 드라마 PD가 너무 멀어 보인다.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창문 너머, 학을 위한 연못에서 이리저리 허우적대는 닭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