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새 시집을 들고 독자 곁으로 돌아온 시인 신동호.
유수
덩치를 보니 경향각처 장터에서 황소 서너 마리는 거뜬히 제 몫으로 만들었을 법한 씨름꾼이 분명하다. 근데 이것 봐라. 여고생 울리는 속살거리는 시로 열아홉 나이에 일찌감치 등단한 시인이란다. 게다가 손아래인 내게 먼저 악수를 청한다. "당신이 쓴 기사를 잘 봤"단다.
그 씨름꾼 아니, 시인과 죽이 맞아 만난 첫날부터 둘 다 꽁꽁 언 아스팔트를 맨발로 걸어 다닐 만큼 폭음을 했다. 그게 벌써 14년 전 겨울 이야기다. 그 씨름꾼 혹은 시인이 바로 신동호(49)다. 세월은 흘러 갓 서른이던 나는 40대 중반이 됐고, 신 시인은 낼모레면 머리칼에 서리 내린 쉰이다. 망 지천명(望 知天命).
그 14년의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신동호를 만났다. 대부분이 술집이었고, 가끔은 그가 남과 북의 문화교류를 위해 고투하던 공간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사무실이었으며, 더 가끔은 발 넓은 신 시인이 너나들이로 친한 세칭 '민중 가수들'의 콘서트홀 혹은, 그가 대본을 쓴 뮤지컬 공연장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고등학교 때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란 명찰을 달고, 갓 서른에 <겨울 경춘선>과 <저물 무렵> 2권의 시집을 낸 작가다. 헌데, 왜였을까? 만남이 거듭됐음에도 나는 그를 시인으로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시인? 혹은, 정열적인 통일운동가?'돈이 되지 않는 것'에 정열을 바치는 것이라면 또래 중 신동호를 따라갈 위인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중학교 시절부터 '돈 안 되는' 시에 목을 맸고, 대학에 가서는 '돈 안 되는' 학생운동에 청춘의 에너지를 쏟다가 감옥 구경을 2번 했다. 30대가 넘어서도 대부분 사람들이 '돈이 안 되니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는 통일을 위해 집보다는 길 위에서 몸을 눕히는 일이 흔했다.
시인 신동호가 아닌 '통일운동가 신동호'에 관해 여기서 구구절절 시시콜콜 오만가지 사연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그는 개념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남한에서 출간되던 북한 예술작품의 저작권 문제를 깔끔하게 매듭지었다. 또 벽초 홍명희의 손자가 쓴 북한 소설 <황진이>가 남한에서 송혜교-유지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 산파 역할을 했으며, 송영길 전 인천시장의 보좌역으로 북한 인사들의 인천 아시안게임 참여를 설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