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놀라게 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임명
국회에서 국정원 국정조사를 둘러싼 여야 대립이 지속되고 있던 2013년 8월 5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에 김기춘을 임명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이 임명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이는 박 대통령이 검찰을 제압해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결과를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도출해내리라 작심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검찰총장·법무부 장관·3선 의원·국회 법사위원장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사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는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같은 날 박 대통령은 홍경식 전 서울고검장을 민정수석에 임명했던 바, 결국 이상의 인사가 겨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사실상 이는 채동욱 검찰총장 체제를 무력화시키겠다는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의지 표명이었다.
실제 박 대통령이 국정원 국정조사 종료 3일 뒤 "작금에는 부정선거까지 언급하는데 저는 지난 대선에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라고 재차 강변한 것은 이러한 기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기춘 비서실장 임명의 의미는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을 국정운영의 중추기관으로 규정해 김기춘을 '권력 2인자'로 추켜세웠다. 그런데 김기춘의 '2인자 등극'은 그의 경력으로 볼 때 심상찮은 조짐이었다. 김기춘은 유신헌법 초안 마련의 실무를 맡았고, 유신 후반기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을 지내며 각종 용공조작 사건을 만들어냈으며,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니 '극우 올드보이' 중에서도 '상올드보이'였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발상과 인사는 유신시대를 재현하겠다는 욕망이 발현된 것이었고, 더 나아가 2013년 7∼8월 국정원 국정조사의 기간을 거치며 정국주도권을 장악한 박근혜 정권이 이후 한국정치·사회 전반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예고는 8월 19일에도 있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태평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는, 위기 조장 발언을 했다. 실제 그로부터 열흘 뒤 박 정권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사건을 터뜨렸다.
박근혜 정권 '9월 공세'의 첫 신호탄, 내란예비음모 사건 발표
국정원 국정조사가 끝난 뒤인 2013년 8월 말부터 이해 연말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은 한국정치, 사회 전반을 겨냥해 칼을 빼들었다. 그리하여 헌정사상 초유의 일들로 구성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련의 충격타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즉 이 기간 이석기 내란예비음모 사건 발표와 공안정국 형성,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교학사) 검정통과,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 여야 3자회담 결렬, 경제민주화 및 복지공약 후퇴와 진영 복지부 장관 파동, 윤석열 국정원 특별수사팀장 교체 및 징계, 전교조 법외노조화, 새마을운동·유신독재 띄우기,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및 소속 의원 의원직 박탈 청구, 대통령 사퇴촉구 천주교 시국미사와 무차별 종북몰이, 철도 민영화 반대 철도노조 파업과 초강경 진압대응 등 정권 차원의 정치적, 사회적 공세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야말로 정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국내정국과 사회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다름없었고, 87년체제가 성립한 이래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사회적 공세는, 1949년 이승만 정권의 6월공세(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 이후 친일파 중심의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반민특위 해체, 김구 암살, 국회프락치사건, 국민보도연맹 조직 등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공세를 전개한 바 있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서 '박근혜 정권의 2013년 9월 공세'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2013년 9월에만 그치지 않고 이해 하반기 내내 이어졌다는 점에서, '9월 공세'라는 규정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2013년 하반기에 연속된 박 정권의 정치적, 사회적 공세들이 이해 9월부터 본격화된 점에 유의하여 편의상 이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기획한 9월 공세의 첫 타깃은 통합진보당이었다. 2013년 8월 28일,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 당원 및 외곽단체 인사들을 내란예비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격 압수수색 및 체포하였다. 1980년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이후 33년만이었다.
그 직후 국정원발 보도가 지상파, 종편, 극우언론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주된 내용은, 이석기 의원 등이 RO라는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해 북과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한체제를 전복하고자 국가기간시설 파괴 계획을 세웠으며, 특히 이 의원은 조직원들에게 사제 총기 제작까지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이례적으로 수사 전면에 나선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3년 동안 내사해왔으며 관련 증거로 녹취록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이 의원 변장도망설부터 시작해 이들 조직원이 적기가를 부르고 밀입북한 정황을 포착했다거나 이 의원 자택에서 발견된 현금 1억 원이 북의 자금일 수 있다는 식의 미확인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사실상 8월 28일부터 3, 4일 동안 방송, 포털, 신문 등 거의 모든 언론매체는 국정원발 '내란음모' 보도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은 이를 국정원의 '날조'이자 '용공조작'이라 항변했지만, 피의사실이 연일 유포된 이상 언론재판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실 강제수사를 마다하며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국정원 국조 때와 달리 직원들의 카메라 노출을 꺼리지 않는 등 '언론플레이'를 하였다. 이는 야권이 주장해온 국정원 국내파트 개혁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비쳐졌다.
진보언론, 민주당도 자유롭지 못했던 '종북 낙인'의 공포분위기
이를 계기로 정국은 급속도로 "의회와 선거 등 절차적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정치적 조건 속에서 공안기구의 주도권이 관철되는 억압적 통치방식", 즉 공안통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워낙 '상상할 수 없었던' 비상한 사태가 갑자기 터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보당은 소수정당이지만 원내 제3당이어서 사회적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면 공포분위기를 자아냈다.
실제 이 사건 직후 주말 촛불집회의 규모가 전주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념공세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천주교만이 이 시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9월 초 천주교 모든 지역 교구가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대한 시국선언에 참여하였고, 천주교 평신도들은 시국선언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일부 극우단체 회원들에 의해 진보당, 심지어 민주당에까지 '백색테러'가 잇따랐다. 뒷날 어느 통합진보당원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벌어졌던 예비검속 등이 현실적 공포로 다가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한겨레> 2013. 11. 8)
물론 몇몇 언론들은 개혁위기에 직면한 국정원의 국면전환 의도라 지적하기도 하고, 내란음모 혐의 사실이 입증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종북프레임이 지닌 강한 규정력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87년 이전 한국이라는 국가를 지배했던 반공주의의 변형이자 분단체제하의 낙인찍기였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한국사회에서 '종북'이라는 개념은 엄밀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한 논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종북은 북한의 분단기득권세력을 옹호하거나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다 는 의미로 엄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단순히 북한의 사상과 이론을 우리 사회에 변용하 려고 노력하거나 또는 특정 문제에 대해 북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만으로 종북의 혐 의를 씌울 수는 없다.(이승환, <이석기사건과 '진보의 재구성'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162, 2013, 333쪽)
그러나 이 시기 종북 낙인은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고, 진보언론과 민주당마저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리하여 사건 직후 진보언론들은 '국정원과 이석기의 적대적 공생론'의 입장을 취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뉴욕타임스> 등 해외언론은 이석기 사건을 박정희 시대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비교해가며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국내언론에서 이석기 사건의 실체적 진실 여부와 국정원이 내놓은 증거물에 대한 본격적 의혹 제기는 사건 발표 5일 뒤에 가서야 겨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한겨레> 및 <한국일보> 2013. 9. 2)
사실 이석기 사건은 사건 자체의 엄중성만큼 그 내용과 관련해선 내란음모의 실행 가능 여부, RO조직의 실재 및 지속성 여부 등이 언론에 의해 객관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실제 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이 제시한 증거물인 '녹취록'에 대한 의혹은 뒤로 갈수록 끊이지 않았다.
단적으로 국정원이 녹취파일의 내용을 호전적으로 바꾸어 녹취록을 작성했다가 뒤늦게 수정한 곳만 272곳에 이르렀고(<한겨레> 2013. 11. 18) 제보자의 진술서를 사전에 작성해두는 등 '짜맞추기 수사'를 한 정황도 밝혀졌다.(<뉴시스> 2013. 11. 22)
뿐만 아니라 이른바 RO의 실체에 대한 객관적 물증도 없었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은 오로지 제보자의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었으나, 제보자의 진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마저 증거능력의 측면에서 의심받았다.(<한겨레> 2013. 12. 30). 그럼에도 사건 발표 직후 대개의 보도, 특히 주류언론의 보도는 국정원발 보도로만 채워졌고, 그 내용을 의심하는 보도는 거의 없었다.
이런 양상은 법원의 판결에까지 이어졌다. 2014년 2월 17일, 법원은 이석기 의원에 대해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으며,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징역형과 자격정지를 선고했다. 이석기 의원은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만들어낸 '두 번째 희생양'이었다.
한편, 민주당 역시 사건 직후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민주당은 국정원 개혁 좌절을 우려하면서도 진보당과의 거리두기에 분주했고 당분간 촛불집회에도 불참키로 했다. 이런 속에서 이석기 사건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 행보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은 9월 4일 신속하게 처리됐다.
민주당은 그 직후 국정원 개혁을 외쳤지만 그 동력은 현저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진보당이 한때 민주당의 연대 상대였다는 점에서 이석기 사건은 민주당에 대한 위협적 사건이기도 했다. 실제 이 무렵 새누리당은 민주당을 '종북 숙주당'으로 몰아붙였다. '온순한 야당' 민주당마저도 종북으로 몰리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존재는 오직 새누리당뿐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