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민주주의가 공산주의?

[다시 보는 2013년 한국정치史⑩]

등록 2014.07.27 10:48수정 2014.07.27 10:48
0
원고료로 응원
조봉암 사형마저 정당화 한 새누리당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정권에 의해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새누리당의 이석기 의원 제명안 제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부 차원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해산심판 청구였다. 2013년 9월 6일, 새누리당은 이석기 의원 제명안을 국회 윤리위에 제출했고, 법무부는 통합진보당 해산 TF를 마련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10월 18일, 국회 헌법재판소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아직 진보당해산심판청구가 결정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헌정당해산결정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통합진보당은 만들어질 때부터 북한의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당", "통합진보당 강령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공산당이나 다름없는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고, 심지어 지난 2011년 간첩 혐의 무죄 판결을 받은 조봉암의 사형집행이 사법 살인이 아니며 정당한 것이었다는 논지까지 폈다(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이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자신의 최대 라이벌로 떠오르자 진보당을 해체시키고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에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진보당 해산 논리까지 끌어온 것이다. 이는 박 정권의 진보당 해산 추진과 역사인식체계의 극우적 재편 간의 함수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새누리당의 '역사적 유전자'가 이승만 정권기의 자유당에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가보안법·분단체제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사상적 다원성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정치적으로는 새누리당 정권의 강화로, 이념적으로는 극우반북 일변도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석기 사건 이틀 뒤인 8월 30일, '뉴라이트 교과서'인 교학사 한국사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심의를 최종 통과했다. 이처럼 이석기 사건과 뉴라이트 교과서 통과는 짝을 이루며 한국사회 정치적·사상적 지형의 재편을 겨냥하고 있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정당 해산심판 청구와 정치·사상적 다원성의 위기

그러면 박근혜 정권이 9월 공세의 첫 타깃으로 통합진보당을 겨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현실적으로 볼 때 진보당은 새누리당에 대해 유력한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이 진보당을 압살하고자 한 것은 정치적 목적에 더해 이념적·사회적 목적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18대 대선 과정을 상기해보면 뚜렷해진다. 2012년 12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날은 대선후보 1차 TV토론회가 열린 날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는 진보당 이정희 후보를 향해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며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이 후보는 그간 박정희·박근혜와 관련해 주류언론도, 민주당도 외면하던 역사문제들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박정희를 다카키마사오로 지칭하는 한편, 정수장학회, 6억 원의 실체 등을 공식 제기한 것이다. 또 박 후보가 유신시대의 사고와 행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여왕'임을 상기시키면서 새누리당을 향해 '친일과 독재의 후예', '매국세력'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이날 박 후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 이 후보가 제기한 역사문제들은 그간 극우 기득권세력에 의해 공공담론 영역에서 금기시되던 문제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카키마사오'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그 여파가 컸다. 이에 새누리당은 위기감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점은 새누리당이 1차 토론회로부터 불과 3일 만에 이른바 '이정희 방지법'을 발의한 사실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이정희 방지법의 내용은 TV토론 참가자격을 지지율 15% 이상인 후보로 제한하는 것으로서 이는 전형적인 '파쇼적 발상'이자, 보잘 것 없다고 여긴 세력에게 '일격'을 당한 데 대한 '졸렬한 분풀이'였다.


그리고 이날의 기억은 새누리당에 향후의 장기집권을 위해선 공공적 역사인식 및 이념체계 조작의 중요성을 재차 환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후속 기사에서 기술하겠지만, 실제로도 내란음모사건 발표에서 시작해 이해 9월 이후 박 정권에 의해 벌어진 일련의 사태(=9월 공세)들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유럽순방 와중이던 11월 5일,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이 국무회의에서 전격 처리되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날 법무부가 제시한 진보당의 위헌성은 위의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과 그대로 일치하였고, 아울러 진보당 해산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진보적 민주주의,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그러나 통합진보당 강령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나 다름없다는 박근혜 정권의 논리는 그들이 통합진보당 강령을 아예 읽어보지 않았거나 혹은 난독증에 걸려있다는 반증에 불과한 것이었다. 통합진보당 강령의 전문(前文)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은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 3.1운동과 민족해방운동·노동해방운동, 4.3민중항쟁, 4.19혁명, 부마항쟁과 5.18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과 7·8·9 월 노동자 대투쟁, 촛불항쟁 등 도도히 이어져온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계승하는 정당이다.

통합진보당은 우리나라와 세계 진보 운동의 이상과 역사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며 자주·평등·평화·자유·복지·생태·인권·소수자권리·연대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새로운 대안 사회를 지향하는 진보정당이다.

통합진보당은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등 일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정당이며 그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어나갈 것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하여 청년 여성 중소 영세상공인 빈민 사회적 약자 및 사회 각계 각층의 다양한 진보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대변하겠다.

통합진보당은 제국주의 침략과 민족 분단과 군사독재, 초국적 독점자본과 재벌의 횡포와 수탈,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파괴, 성차별등으로 얼룩져 온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고, 오늘 날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위기, 권위주의 정치가 빚어낸 민주주의 위기, 개방 농정과 살농정책으로 인한 식량주권의 위기, 전 지구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생태위기, 강대국 패권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전쟁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민중이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

통합진보당은 한반도 비핵 평화체제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고, 인간 존중, 노동존중 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한겨레> 2013. 11. 5)

이 정도의 진보적 색채를 가지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운운한다면, 아예 경제민주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사회적 활동과 투쟁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엄포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일제 식민지 시기 우파계열의 독립투사들 역시 줄기차게 추구한 것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법과 제헌헌법에까지 이어진 사상이었다. 한국 제헌헌법의 지향점은 '정치적 자유는 무제한으로 보장받아야 하지만, 경제적 자유는 공공복리의 선을 넘어서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위의 전문에 이어 '특권 부패 정치구조 척결과 진보적 민주정치를 위하여', '민생중심의 자주 자립 경제체제 실현을 위하여', '연대와 참여를 통한 복지공동체 구현을 위하여', '노동이 존중받고, 민중생존권이 보장되는 경제적 평등 사회 실현을 위해', '진정한 성 평등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고 지속가능한 사회체제를 위해', '자주와 평화가 보장되는 한반도, 민족의 통일 체제를 향해' 등 몇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 통합진보당 강령의 세부 조항을 살펴보면, '보편적 복지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설정하고(강령 제17조),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공공성 강화와 불평등 해소를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강령의 사회, 경제 관련 조항들의 성격을 굳이 따진다면, 제헌헌법이 지향했던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령의 제12조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고 적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통합진보당 강령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을 뿐,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있다거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북의 주체사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단적으로 강령의 조항 중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조항이 전혀 없다.

설령 자본주의에 반대 좀 하면 어떤가? 그게 그렇게 대수인가? 그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만이 인류의 최선(最善)이라 말한 적은 없다.

아울러 강령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강령의 정치관련 조항에 제시된 국가기구의 민주적 재편, 정당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확립, 특수 권력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국가 주권 확립 등을 '종북'으로 몰아붙인다면, 이는 한국사회의 기본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사실상 북의 유일체제를 지향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결국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이 이 정도의 내용을 불온시하며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역으로 그들이 특권과 부패가 판치는 사회, 불평등이 고질화된 사회, 치열한 경쟁사회, 정치·사회적 강자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 노동자와 민중생존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정의와 평등이 없는 사회, 강대국에 종속된 주권 없는 국가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민주주의 사회에선 그 어떤 누구도 개인이나 정치·사회집단의 사상적 자유에 간섭하거나 박탈할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통합진보당 강령을 둘러싼 논란은 박근혜 정권, 더 나아가 한국사회가 도달한 정치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비록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일지라도 민주주의 사회라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장점도 자유롭게 연구되고 운위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불온'이나 '금기'야말로 용납될 수 없는 언어다. 박근혜 정권이 내세운 '창조경제'가 현실화되려면 사상과 이념에 대한 일체의 제약과 제한이 박멸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 대목에서 '영원한 자유'를 목말라하며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분투했던 시인 김수영이 지금으로부터 54년 전, 4월혁명 직후에 썼던 시 한 편을 인용해본다.

'김일성만세' /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 시인이 우겨대니 /
나는 잠이 올 수밖에 /
'김일성만세' /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 관리가 우겨대니 /
나는 잠이 깰 수밖에.(김수영, <김일성만세>, 1960. 10. 6)

우리는 지금, '진보적 민주주의'가 공산주의이고, 그래서 통합진보당이 종북세력이라며 우겨대는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의 논리에 잠이 확 달아날 수밖에 없다. 54년 전 김수영의 외침이 다시 절실해졌을 만큼, 지금 우리 역사는 엄청난 반동의 격랑에 휩싸여 있다. 2010년대 한국인의 자유는 '진보적 민주주의', 이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 문헌

<정부가 문제삼은 통합진보당 강령 전문>, <<한겨레>> 2013. 11. 5.
윤성환, <'폭주'하는 박근혜 정권, 정치보다 '선거운동'>, <<오마이뉴스>> 2013. 11. 15.
윤성환, <'무상' 공약 하면 좌파? 무상은 대한민국 정체성>, <<오마이뉴스>> 2014. 4. 13.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실천문학, 2013.
#통합진보당 강령 #조봉암 #다카키 마사오 #제헌헌법 #사상적 자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3. 3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4. 4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5. 5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