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아래서 비키니 입은 여인이라니...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54] 대지가 포효하는 도시, 라 포르투나

등록 2014.08.09 19:13수정 2014.08.0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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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아래서 맞은 최악의 크리스마스

몬테베르데에서부터 시작된 비는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꼬박 삼일을 꾸준히 내리던 비는 몬테베르데를 떠나던 날 아침 그치나 싶더니, 두 번의 보트와 버스를 타고서야 도착한 화산마을 라 포르투나(La Fortuna)에 도착했을 때 엄청난 먹구름으로 나를 맞았다. 꾸준히, 너무 거세지 않게, 마치 이런 곳에서 방황하는 여행자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는 크리스마스 이브인 그날에도 쉬지 않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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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비친 햇살은 반나절을 채 가지 못하고, 금세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라 포르투나의 전경 ⓒ 김동주


며칠간 계속 내린 비 때문인지, 아니면 크리스마스를 앞둔 탓인지 라포르투나의 모든 것은 정지한 것처럼 고요했다. 지나가는 여행객을 부추겨 온갖 모험을 했을 여행사의 직원은 나의 등장에 손으로 연신 하늘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푸라비다'도 이럴 때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립더니 한국으로의 짧은 통화를 끝내고 나니 그녀의 얼굴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이, 내가 좋아라 마지않던 그녀의 까만 구두가, 노란색 포스트잇에 '밥 꼭 챙겨 먹어요' 라고, 책상 앞에 붙어 있던 글자들까지,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짧은 인사로 이별만을 나눈 한 여행객이 떠난 뒤,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숙소의 텅 빈 의자에 앉아 나는 빈 옆자리의 의자도 내가 앉은 의자처럼 뒤로 눕힌 다음, 몸을 비스듬히 눕혀 야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리스마스인 내일은 그녀와 내가 만난 지 3년째가 되는 날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안부를 물으면서 그녀에게 미안한 심정을 남겼다. 그녀의 부재에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워하는 것 대신으로 선택한 잠은 그리 길지 못했다. 자정이 넘어 마침내 크리스마스가 되자 누군가 마당에서 요란한 소리로 그들이 믿는 신을 향해 주문을 외워댄다. 나는 저항도 할 수 없이 한 동안 그 소리에 온몸을 격하게 뒤틀었다.

우뚝 솟은 화산 아래에서 맞는 색다른 크리스마스는 그들에게는 '시처럼 멋진 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나는 불쑥 차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가 '10시 이후로는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적힌 게시판의 종이를 찢어 보이며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딸깍, 다시 내 손으로 내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바보 같다는 생각에 베개에 얼굴을 묻어보지만 그저 주룩주룩 흐른다. 건드리면 터질 듯이 팽팽한 몸 상태가 두려웠다.


당신은 외로웠을까. 내가 떠난 뒤 남아 있던 그 세계지도를,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가고 있는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가. 나는 여행을 떠난 뒤 처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 밤 내내 그녀를 앓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발디 온천(Baldi Hot Springs), 신선들이 노니는 천국

결국 201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그 밤, 그때까지 잘 버텨왔던 몸이 바닥을 드러냈다.

끓는 듯한 열에 한동안 어지러움을 호소하다 지쳐서 잠이 들면 또다시 몇 시간 후에 고통과 함께 깨는 과정이 반복됐다. 겨우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보니 밤새 흘린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만약 그때의 내 얼굴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웃지 않는 남자' 라고 이름을 지었으리라.

해가 뜨고서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여기까지 잘 업혀온 배낭에 더 이상 손대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그녀의 부재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요컨대 나는 이미 충분히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움츠러들고 싶었다. 안도 밖도 눅눅한, 이국의 산간 마을 도로에 면한 방에 갇힌 나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자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비가 잦아든 틈을 타 근처의 온천을 찾았다. 마을에서 입장권을 끊고 나니 가는 길이 문제다. 발디 온천리조트(Baldi Hot Springs Resort) 까지는 약 4km. 말없이 문을 나서는 내게 여행사의 직원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니 한사코 택시를 타라고 했고 결국 나는 그가 직접 잡아준 택시를 타고 온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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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디 온천(Baldi hot springs) 아레날 화산으로 데워진 근처의 강물을 끌어다가 만들어진 온천 리조트. 인공적으로 만든 리조트이긴 하지만 실제 정글속에 지어져 그 풍경과 분위기가 기가 막히다. ⓒ 김동주


옷을 갈아입고 들어선 그곳은 마치 신선들이 노니는 천국 같았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워터파크처럼 리조트 내에 바와 식당이 들어서 있지만 발디 온천을 둘러싼 무성한 정글은 모두 진짜다. 그야말로 외딴 섬의 정글에서 온천욕을 하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미온수 때문에 근처만 가도 카메라 렌즈가 뿌옇게 흐려진다. 크리스마스를 지낸 가족들과 연인들은 바깥 세상의 일은 잊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여유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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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 멋들어진 조명이 빌디 온천 리조트 곳곳을 비춘다. ⓒ 김동주


결론적으로 라포르투나의 온천은 여행 슬럼프를 겪기에는 너무나 멋진 곳이었다. 때가 되면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사를 하고 사람들은 또 다시 드넓은 숲을 헤치고 어딘가의 온천에 누워 신선놀음을 즐겼다.

여전히 내리는 비가 상체를 차갑게 식혀 주니 온천욕을 하기에는 최고의 날씨였을지도 모르겠다. 무려 28개의 풀장으로 이루어진 발디 온천의 조경은 혀를 내두를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해가 지고 사람이 드물 때 즈음 온천을 빠져 나오고 나니 다시 돌아갈 일이 걱정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씩 보이는 가로등 외에는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산간도로를 따라 마을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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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르투나의 밤 지금 생각해보면 인도가 따로 없는 마을 외곽길을 밤에 홀로 걷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 김동주


가끔씩 지나치는 차들은 깜짝 놀라며 연신 경적을 울려댔고 나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그저 터벅터벅 걸었다.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외로움이 증폭된 것만 같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즈음 다시 비가 내려 이제 막 마르기 시작한 몸을 다시 적셨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온통 시커먼 그 세상이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인 것만 같아 한없이 무서웠다.

그날 내가 어떻게 숙소에 무사히 돌아왔는지 정확히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젖은 옷을 걸친 채 무너졌을 때 마치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몸이 한번 튕겨져 올랐다는 것뿐이다. 내 여행은 그때부터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었다.

타바콘(Tabacon), 마그마로 데워진 강

다음날 젖은 채로 잠에서 깬 나는 그곳이 숙소의 침대임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지긋지긋한 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떠나는 것 밖에 없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레날 화산(Volcano Arenal)으로 가는 트레킹 길에 올랐다. <쥐라기 공원>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코스타리카의 정글 속에는 무려 11개의 화산이 숨어 있다.

그 중에서도 아레날 화산은 2010년까지도 요동쳤던, 코스타리카 최고의 여행지 중의 하나다. 요컨대 라포르투나는 1968년에 있었던 대폭발로 입은 상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화산 아래 특급 온천 리조트가 들어선 이색 여행지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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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날 화산 전망대 며칠간 계속된 운무로, 그 뜨거운 화산마저 가려져버렸다. ⓒ 김동주


비는 끝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날도 오락가락을 반복하던 비로 피어난 안개는 해발 2700m 높이의 화산 봉우리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맑은 날이면 반경 수 킬로미터 바깥까지 실려온다는 유황 냄새도 운무에 뒤섞여 그저 비에 젖은 풀 냄새뿐이었다.

정글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던 가이드는 보이지 않는 화산 대신 여러 가지로 함께 한 여행자들의 흥미를 이끌려고 했으나 역부족으로 보였다. 적어도 타바콘 온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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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콘 강 마그마로 데워진 천연 시냇물에서 수영복을 입은채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전세계에서 오로지 라포르투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 김동주


정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천수가 불어나 강을 이룬 타바콘 강(Tabacon River)은 아레날 화산 아래로 흐르는 마그마로 데워진 시냇물이다. 그 어떤 '인공'도 더해지지 않은 강물에서는 유황 냄새가 피어났다.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살짝 발을 담그는 순간 몸에서 알 수 없는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나 따뜻한 물이 어디에서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타바콘 강의 물은 온통 미네랄 덩어리인 진짜 화산 온천수다.

바닥을 긁어보라는 가이드의 말에 땅을 짚은 양손 가득 화산재가 쌓여서 생겨난 진흙이 묻어났다. 마치 손바닥을 통과할 것만 같이 곱고 부드러운 그 진흙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는 비명을 지른다.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모두 끼고 있는, 열대의 사람들이 온통 화산으로 몰려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화산 아래에서 비키니를 입은 채 온천욕을 즐기는 여인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묘한 일이지만 말이다.

차로 산을 한 바퀴 돌 때까지도 보이지 않는 화산 덕에 우리는 해가 진 뒤 다시 한 번 타바콘 강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행운을 누렸다. 결국 떠나는 그 날까지도 보지 못한 화산에 대한 아쉬움은 잊은 지 오래다.

너무나도 힘든 크리스마스를 안겨줬던 라포르투나를 떠나던 그 날, 나는 꽃이 핀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이름 모를 개구리가 부러워졌다. 온몸을 무지개 빛으로 장식한 녀석은 맑은 날이면 찰나에 드러날 화산 아래에서 마음껏 온천욕을 즐길 테니 말이다.

간략여행정보
수도인 산호세에서 버스 한 번, 몬테베르데에서는 보트와 버스를 섞은 지프-보트 투어를 이용해서 갈 수 있는 라포르투나는 90%가 식당과 여행사와 리조트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다. 1년 내내 아레날 화산 둘레를 걷고 천연 온천인 타바콘 강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볼케이노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투어에는 차량과 전문 가이드가 동행을 하며, 미처 모르고 지나갈 만한 정글의 여러 가지 생태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루가 금방이다. 날씨가 바쳐준다면, 분화구인 쎄로 차토(Cerro Chato)까지도 오를 수 있다. 단, 비싸고 맛없는 식사를 할 생각이 없다면 도시락 정도는 미리 준비할 것을 추천한다.

타바콘 강에서 즐기는 온천욕으로 부족하다면 마을 근처의 온천 리조트를 방문해 보자. 본문에 소개된 발디 리조트는 라포르투나의 수 많은 리조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단 대부분의 리조트는 마을 외곽에 있어 그곳에서 묵지 않는다면 택시 외에는 갈 방법이 없다. 아래는 투어와 온천 입장료 가격(2012년 12월 기준)

볼케이노 트레킹 : 35달러
발디 리조트 온천 입장료 : 28달러(뷔페 식사 한끼 포함)

#아레날화산 #라포르투나 #타바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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