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동구학원(동구여중, 동구마케팅고) 정문.
권우성
첫사랑 같은 동구 학원에서의 교직 생활저는 1988년 11월 17일 동구여중에서 정식 교사로 첫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80년대의 상황 속에서 국문학 공부를 충실히 하지 못했습니다. 사범대도 아니라서 교직 과목을 이수는 했지만 교육에 대한 철학이나 방법 등을 잘 모르고 사회 초년생으로 교직에 첫 발을 들였습니다. 초임이니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야 누구 못지않았지만 전문성이 부족한 탓에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는 늘 무거운 숙제였습니다.
그 무렵 이오덕, 윤구병 선생님께서 진행하시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만났고 교육은 아이들의 삶을 가꾸고 글로 잘 표현하는 힘을 기르는 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해 겨울 국어교육의 기틀을 잡고 새 길을 열어가는 '전국국어교사모임'(아래 전국모)가 창립했습니다. 내성적인 데다 조직 활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터라 무덤덤하게 살아가던 저였습니다. 그 해 겨울 전국모 창립의 뜨거운 열기는 제 가슴에 새로운 불을 지펴 주었습니다. 좋은 교사로 살아가려면 용기와 지혜와 사랑이 필요한데, 그 모든 것이 부족하던 제게 일단은 글쓰기 교육과 뜨거운 열정이 먼저 다가온 것이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문제집 푸는 기술만 배우다가 막상 교사가 되니 무엇을 가르칠까 고민이였는데 두 만남이 저를 새롭게 변화 시켰습니다. 참고서, 문제집을 버리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삶을 담아내라.
1989년 봄, 저의 학급운영과 국어 수업은 주로 글쓰기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모둠 일기 쓰기와 생활글쓰기가 주요 활동이었습니다.
당시 생명 사상을 펼쳐내는 김지하의 영향을 받는 저는 교실 뒤편에 김지하의 <밥>이라는 책 표지에 그려진 달마 대사를 크게 그려 전시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늘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 동양사상을 좋아하고 서구의 기독교나 마르크스 사상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터라 제 교육 철학이나 활동 속에 그런 부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동구학원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곳이라 종교행사는 가끔 있어도 그걸 강요하는 곳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 억압적인 독재정권과 입시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밥 먹으며 시계 보고 시계 보며 또 먹고>, <불량제품들의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같은 책들이 나와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외침이 사회적 공명을 얻을 때였으니 학생들의 고통을 담은 생활글은 당시 국어교사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공동 창작시였는데 풍자와 유머가 가득했습니다. 재미난 학생 생활시집입니다.
동구여중에서 저는 학교 교훈의 이름을 가진 신문 <정심>을 편집하는 신문반 담당 교사였습니다. 학교 신문에 사회비판적인 공동창작시를 실었다가 주변 선생님들로부터 여러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일부는 "왜 그런 내용을 싣느냐"하는 질책이었고 일부는 "아이들의 삶을 잘 담아낸 좋은 글"이라는 칭찬이었습니다. 1989년 당시 동구여중에는 젊은 선생님들이 많아 자주 어울리며 삶을 나누었지만 특별한 조직을 형성하거나 단체 활동을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누구 못지않은 분들이지만 시대의 모순을 몸소 느끼며 자기 삶 속에서 실천할 만한 역량은 부족한가 싶은 그런 분들이었죠.
학교의 탄압에 못 이겨 비겁하게 도망친 나1989년 5월이 왔습니다. 한국 사회, 특히 교육계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었습니다. 한국 교육운동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아래 전교조)가 창립되었습니다. 전교조와 정권의 충돌로 학교마다 들썩거렸지만 동구학원은 조용했습니다. 재단에서 교사들을 임용할 때, 성향을 잘 파악한 탓인지, 시국은 엄중해도 앞에 나서거나 밑에서 움직일 만한 교사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선발한 까닭이겠죠.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혼자서 생각은 많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는 하지만 남들과 연대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도 많이 느끼고 나설 용기도 없는 평범한 교사였지요.
저로서는 아이들에게 글쓰기 교육만을 강조하던 시절이었는데 학교 측에서는 시국이 엄중해서인지 저의 교육활동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실 뒤편에 붙어있는 그림을 보고 슬쩍 압력을 가해오기도 했습니다. '달마대사와 밥이 한울이다'의 조합. 보수적인 기독교 재단이 보기에는 불교적 색채도, 평등의 구호도 모양새가 불편했겠지요. 막무가내로 뭐라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교감 선생님이나 부장 선생님이 제가 걷어놓은 학생들의 공책을 읽어보거나 제 책상을 간혹 살피고 간다고 주변 분들이 전해 주었습니다. 혹시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어떤 책들을 보는 것은 아닌가 감시를 하는 것이었지요.
일이 터진 것은 가을이었습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재단 측에서 제가 읽고 수업 중에 활용한 <중1 교과서 지침서>라는 책 한 권을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전교조와 전국모의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비판적인 사회 의식을 기르게 하고자 만든 교과서 지침서입니다. 당시 국어 교과서는 국가주의와 순응주의를 강요하는 듯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이 지침서는 교과서를 재구성해서 학생들의 의식을 변화시키자는 취지가 명료하게 드러난 책이었죠.
학교의 관리자들은 제 책꽂이에 그 책이 있는 걸 보고, 제 수업과 그 책의 연관성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정하지 않았고 긴급 부장회의를 소집한 학교 측은 제게 특별회의에 참석할 것을 통보했습니다. 공식적인 징계위원회는 아니었고 저를 겁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고 생각됩니다. 경위서나 시말서 같은 서류를 요구한 건 아니고 그냥 들어오라고 한 자리였으니까요.
지난 일 년 동안의 활동을 생각하면 늦은 자리였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원로회의 청문회처럼 교장 이하 부장들이 원형으로 둘러앉은 자리에서 저는 추궁을 당했고 저는 당당하게 제 입장을 펴지 못했습니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태도로 회피하는 저의 좋지 않은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셈이지요.
모르겠습니다. 당시 제가 적극적으로 저항을 했다면 안종훈 선생님처럼 일찍 파면을 당하고 학교를 떠났을지, 그 뒤로 동구의 역사는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당시는 '진달래꽃 처녀'라는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나던 시대이기도 했으니까요(관련기사 :
개학 이틀 전, 고3 담임은 왜 쫓겨났나).
교직 초년생으로 천방지축 자유를 구가하던 저의 삶은 그 후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름다운 동구 교정이 지옥처럼 느껴졌습니다. 학교는 이리도 예쁜데 가을은 그리도 슬프더군요. 성북동 산자락에 위치한 동구여중은 작은 오솔길이 뒷산으로 향해 있습니다. 저의 산책로였는데 그 길 중턱에 넓은 바위에 앉으면 서울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종종 그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길어졌습니다. 단결과 연대 없이 고독과 외로움에 갇혀 살아온 교사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해 겨울, 어느 선배의 소개로 저는 학교를 옮겼습니다. 1989년 일 년을 동구의 전설처럼 뜨겁게 살았지만 저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몇 년 뒤 그 학교에 근무하던 동료교사들이 결혼도 하고 전교조 분회 창립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요. 실제 전교조 전국교사대회나 서울지부 집회 같은 곳에서 간혹 그 학교 선생님을 만나면 마치 고향 사람을 본 듯한 반가움이 일면서도 나는 혼자서 고향을 등진 도피자라는 부끄러움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25년이란 시간은 제 인생의 반나절입니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할 시간.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개벽에 가까운 변화가 있었지요. 전교조 창립이 1989년인데 2014년 다시 '법외노조'로 몰린 오늘 동구에서 슬픈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 묘한 시점이지요. 저는 전교조 창립 후에 금방 동구에서 쫓겨나듯이 떠나왔는데, 전교조가 법외노조 통보를 받고 얼마 안 되서 내부 비리를 고발한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쫓겨난 일이 과연 역사의 우연일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