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
문희일
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서 삼국시대 때부터 주요 접전지였다.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는 고려 조정이 강화로 천도를 해서 39년 동안 버텼던 곳이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 때도 왜군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곳이었고,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피신을 했지만 후금군(後金軍)이 함락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강화도는 금성탕지(金城湯池)였다. 그러나 이 천혜의 요새는 병자호란 때 짓밟히고 말았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에서 항거하고 있는 인조와 조선의 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세자빈과 대군이 있던 강화도를 쳤다. 전쟁이 난 지 한 달 보름여만인 1월 22일에 강화도가 무너지자 조선은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1월 30일에 항복했다. 임금(인조)은 오랑캐(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었다.
삼전도의 치욕보다 더한 강화도의 참혹함
우리 역사에서는 이것을 뼈아픈 치욕으로 그린다. 하지만 청군에게 도륙을 당한 강화도의 백성들이 겪은 참혹함은 그 어디에 비할 바가 없을 정도였다. 정양(鄭瀁, 1600~1668)이라는 사람이 쓴 <강화도 함락 참화 수기>라는 책에는 그때의 참상이 가감없이 그대로 담겨 있다.
청군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고 또 바다에 뛰어들지만 피할 곳은 없었다. 사람들은 자결하려고 칼로 목을 찌르고, 바위에서 뛰어내렸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삼전도가 치욕의 공간이었다면 강화도는 참혹한 죽음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난리가 나자 인조는 체찰사(전시 총사령관)인 김류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검찰사(강화 경비사령관)로 임명했다. 당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이었던 김경징에게 최후의 보루인 강화도를 지키라는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