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인의 우상숭배를 조각해 둔 가면(좌), 각 월을 상징하는 마야의 그림을 조각한 목걸이(우). 튼튼한 목재에 화려한 색감, 잘 코팅된 마감까지 나무랄데가 없는 가면은 지금도 내 방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
김동주
얇고 넓은 원판의 형태를 한 달력은 분명히 배낭 속에서 부러질 것 같아 도저히 짊어질 수가 없노라며 미안함을 무릅쓰고 간신히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가면을 파는 남자와 마주쳤다. 마야가 숭배했던 세 가지 우상, 건강과 사랑 그리고 부를 표현한 그 기묘한 가면은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사랑'이라지 않는가. '연애'나 '사랑'의 감정보다는 종족의 보존을 목적으로 살았을 고대의 사람들이 '사랑'을 숭배했다니.
자세히 보니 가면 윗부분에 여자를 양손으로 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가 곧 '영원한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즉시 나는 흥정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300페소(약 3만 원)를 불렀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충분히 지급할 만한 금액이었지만 나는 절반을 불렀다. 닳고 닳은, 오랜 여행자의 객기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몇 분간의 실랑이 끝에 나는 절반의 가격에 가면을 획득했고 남자는 다시 조각해야겠다며 장비를 꺼내 들었다.
가면을 손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그제야 피라미드로 방향을 돌리던 그때, 마지막으로 앞을 가로막은 것은 마야 달력을 월별로 조각해 놓은 목걸이였다. 그 뒷면에는 자기 가족의 이름을 빼곡히 새겨둔 그는 도통 표정변화가 없었는데 내가 가격을 낮게 불렀을 때도 그랬다. 굳게 다문 입과 이마에 그려진 주름으로 보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만은 욕심을 내려놓고, 내 가족의 생일 그리고 아직 답장이 없는 그녀의 생일에 해당하는 것을 샀다. 결국 치첸이트사의 주인공 피라미드로 눈길을 돌린 것은, 입장하고 2시간이 지난 후였다.
쿠쿨칸 피라미드(Kukulkan Pyramid)의 비밀치첸이트사의 중앙신전인 '쿠쿨칸 피라미드'는 처음 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치첸이트사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와 달리 건조하지 않다는 것, 모래바람에 기침하지 않아도 되는 것 정도의 느낌이었다. 마야 유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멀고도 아득했다.
▲쿠쿨칸의 피라미드(Kukulkan Pyramid)9세기 초 완성된 신전은 동서남북으로 늘어선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자체로 달력이었다. 각각 91개로 된 4면의 계단에 정상 계단을 합하면 1년을 뜻하는 365일이 되는 천문학적인 구조를 지녔다.
김동주
기원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5세기에 만들어진 높이 25m의 쿠쿨칸 피라미드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높이는 140m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름을 올리기에는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리우의 예수상처럼 엉터리 투표의 결과라고 생각하던 그때 나는 어깨 너머로 들리는 가이드들의 이야기 속에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야인들은 이 피라미드를 신전으로 사용했지만, 실은 그 자체로 달력이다. 한 면의 계단이 총 91개인데, 사면에 똑같은 계단이 있고 정상에 있는 1개의 계단을 더하면 그 수가 정확히 365가 되는 것이다. 잉카, 아스텍과 함께 중남미의 3대 문명으로 일컬어지며 최초의 문명인으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그들은 무려 500년 때, 이미 1년을 365일로 계산하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계단 면에는 52년 순환을 상징하는 52개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곧 우리의 음력 60년 주기와 비슷한 셈법이다. 특히 해가 길어지는 춘분과 추분이 되면 태양 빛에 그늘이 진 북쪽 계단의 그림자가 마치 피라미드를 구불구불 내려오는 뱀의 모습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는 곧 '뱀'을 숭배하던 마야의 풍습이다. 그리고 이날 멕시코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가 치첸이트사에서 벌어진다.
▲쿠쿨칸 피라미드의 비밀마야인들에게 생명과 풍요의 상징이었던 뱀. 춘분과 추분의 오후가 되면 생겨난 빛의 그림자 끝에 뱀 조각상이 위치하도록 새겨져 있다. 치첸잇사의 모든 건물에는 이렇게 심오한 이치가 담겨있다.
김동주
또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은 쿠쿨칸 피라미드의 정면에서 발생하는 묘한 공명이다. 처음 유적지를 발견했을 때 네 개의 계단 중 어디가 정면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결론으로 말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모여 박수치고 있는 곳이 정면이라고 한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정면에서 박수를 치면 까마귀와 울음소리와 비슷한 묘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계단과 괴여 있는 돌 하나하나 새겨진 수많은 벽화와 상징들을 모두 다 이해하는 것은 무리지만 이 성스러운 피라미드 앞에서 박수 한 번 치는 것만으로도 생애 최고의 경험이 된다.
▲포타폭 구기장 길이 168미터의 구기장은 오늘날과 달리 관람석이 없는 그저 너른 광장이다. 여기서 행해졌던 포타폭은 손을 사용하지 않은 채 저 작은 구멍에 공을 통과시키는 단순한 규칙의 게임이었지만 승자는 어김없이 산채로 죽임을 당해 제물로 바쳐졌다.
김동주
피라미드와 구기장, 전사의 신전, 시장 등이 자리했던 치첸이트사는 사실 거대한 도시였다고 한다. 특히 사방이 석벽으로 에워싸인 구기장에서는 목숨을 건 경기 '포타폭(Pokta'pok)' 이 열렸다. 전사 기질이 다분했던 마야인들은 벽의 상단 부에 매달린 작은 구멍에 고무공을 넣기 위해 대결을 벌였고, 게임이 끝난 뒤 승자는 어김없이 신에게 봉납되었다. 아니, 그럼 대체 누가 경기에서 이기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가이드의 설명은 이랬다.
"제물은 나쁜 것이 아닌, 더 훌륭한 것을 바쳐야 하니까요. 전사들은 영광스럽게 목숨을 바치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전사의 신전포타폭의 승자는 전사의 신전에서 죽음을 맞았다. 전사의 선전 옆에는 기둥만 남은 천 개의 기둥신전이 세워져있으며, 무수히 많은 해골이 새겨진 담벼락에는 제물의 잘린 해골이 전시되었다. 오른쪽 아래의 반쯤 누운 모습의 석상이 제물의 심장이 바쳐졌던 그릇, 착물이다.
김동주
결국, 그들은 죽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채로 제물이 된 남자는 전사의 신전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아직 벌떡거렸을 심장이 꺼내어져 '착물(Chac-Mool)'이라고 불리는 그릇에 바쳐졌다.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독특한 자세의 석상, 착물은 인간과 신의 중간 형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이 착물에 올려진 제물을 통해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전사의 신전 한편에 새겨진 수많은 해골 문양은 그들의 용맹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등골이 서늘하다.
▲치첸이트사 달팽이 천문대(El Caracol)내부가 나선형으로 되어 있어 '달팽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원형 건물의 위로 하늘을 관찰할 수 있는 창과 문이 연결되어있어, 천문대로 사용되었다고 추측된다.
김동주
한편, 치첸이트사의 서쪽에는 마야인들이 사용했던 천문대가 남아 있다.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농경 생활을 했던 마야인들에게는 기후예측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확한 달력을 만들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했던 이들이 그토록 지독한 미신에 사로잡혔다니, 마야의 지배자들이 공포정치를 펼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믿음이 가진 양날의 검에 스스로 베인 것일까.
▲치첸이트사의 전체 풍경. 어디에든 올라서면 땅이 꺼지면서 새로운 모험이 시작될 것만 같다.
김동주
뙤약볕에서 네 시간여를 거닐다 어느 그늘에서 바라보는 치첸이트사의 느릿한 풍경 속에는 아직도 많은 신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우뚝 솟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버튼을 누르면 바닥이 푹 꺼지면서 모험이 시작될 것만 같은 풍경. 그 속에서 한 노인이 벌떡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있을 것만 같은. 과연 마야인들은 지혜로운 문명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지배와 피지배에 익숙한 섬뜩하고 무서운 원시인이었을까. 훗날 다시 이곳을 찾으면 그때는 또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줄까.
간략여행정보 |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일대의 수많은 마야 유적을 물리치고 세계7대 불가사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치첸이트사는 과테말라의 티칼(Tikal), 온두라스의 코판(Copan) 과 함께 3대 마야유적지로 불린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과도 같은 두근거림을 주는 곳으로, 휴양보다 모험을 즐기는 여행자들에게는 일종의 성지와도 같다. 마추픽추나 페트라 같은 다른 불가사의 유적에 비해 훨씬 저렴한 입장료(2013년 1월 기준 한화 약 10,000원)도 반갑다.
유카탄 반도의 주도인 메리다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해, 당일치기로 돌아오는 여행도 가능하며 짐을 맡아주는 보관소가 있어 관람 후 다른 도시로 떠나는 일정도 가능하다. 유적지 내에서는 다양한 조각품을 파는데,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니 흥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다면 가이드를 고용해보자. 괜찮은 영어실력을 자랑하는 가이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는 치첸이트사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선명할 것이다. (2013년 1월 기준, 1인당 한화 약 25,000원)
좀 더 자세한 치첸이트사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088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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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긴 사람은 죽인다는데... 왜 이기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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