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덕산군지도1872년 덕산군고지도
가야산에서 남연군의묘와 제각을 중심으로 그려진 1872년 덕산군지도
규장각 자료
1872년에 제작된 덕산군 고지도와(사진) 1872년 이전에 가야사 터에 지어진 남연군의
제각에 관한 고증은 다음과 같다. 승정원일기 고종 9년의 기록을 통해 남연군 제각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조경호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경기전의 일을 마친 후 이어 덕산(德山)으로 가서 남연군(南延君)의 묘소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고, 명덕사(明德祠)를 살펴보니 탈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대신과 예조 판서도 같이 덕산의 묘소에 갔는가?"하자, 홍순목이 아뢰기를"돌아오는 일정에 역참을 배정하였기 때문에 과연 예조 판서와 같이 묘소에 갔습니다."위 대목을 보면 남연군 묘의 제각이 명덕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덕사라는 제각은 조선 왕실 최고의 기술과 시설로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원된 석공과 목수는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로 1893년 남연군 묘(가야사 지)를 방문한 운양 김윤식은 서울 왕릉에 버금가는 제각과 제실이 있었다고 명양 행견 일기에 기록했다.
이 사실은 면양 행견 일기를 통해 고증할 수 있다.
1893년 5월 초 5~6일.
가야동에 도착하니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곳곳마다 물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가야사의 유적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사방을 에워싼 듯 멀리서 바라보니 맑고 깨끗했다.예부터 이 산은 왕기가 있다고 했는데 과연 이곳으로 묘소를 이장한 뒤에 성인이 탄생하고 이어서 용흥(임금)의 경사가 있었으니 지관들이 풍수를 떠드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산을 가꾸고 소나무를 기르고(조경) 각을(집) 짓고 비 세우는 등의 일들이 능소보다 덜하지 않다. 보덕사는 동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역시 갑자년 이후로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이 같은 고증은 필자가 상가리가 고향인 75세 김창남씨를 통해서도 확인했다. 남연군 제각의 건축물과 사당의 이름에 대해 명덕사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아는지 물하니 어렵게 기억을 되살려 명덕사를 정확히 한자까지 기억하며 "어린 시절의 놀이 마당이었던 제각과 그 주변의 웅장한 제실은 높다란 담장이 온전히 있고, 동쪽으로 정문이(홍살문) 있었으며 커다란 현판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현재 가야사 지는 3차 발굴 중이다. 가야사 지 즉, 남연군의 제실(각)의 터를 발굴하는 것이다. 가야사는 1845년 대원군에 의해 불태워 사라지고, 그 터 위에 남연군의 제각을 세운 것이다. 발굴 중인 가야사 지에서 왕실 묘역과 같은 제단으로 추정되는 제각 터를 발견했다. 가야사의 흔적은 제각의 기단 아래쪽에 묻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