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도 피해갈 수 없었던 전쟁의 악몽

[서평] 전쟁의 참상을 일기를 통해 밝힌 소녀 <즐라타의 일기>

등록 2014.11.20 10:19수정 2014.11.20 10:19
0
원고료로 응원
a

한 소녀의 유년시절을 앗아간 전쟁....... 되풀이되지 말기를 ⓒ 최하나


누구나 한번쯤 몰래 본 그 유명한 일기장, '안네의 일기'. 나치의 횡포 아래 유대인들은 죽어갔고 그 마수는 소녀 안네에게도 어김없이 뻗쳐왔다. 가슴에 노란 별을 달지 않기 위해 그녀의 가족은 은신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대학살'은 안네의 일기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나도 그녀의 일기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평화롭던 일상이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에 안네의 일기는 그 어떤 르포나 소설보다도 문학적인 가치가 충분했고 결국 한 권의 책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었다.


그리고 1994년.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20년 전, 나는 그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 서점에 갔다가 <즐라타의 일기>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미래에 투자하는 책을 만든다는 출판사의 신념에 끌렸던 것인지 아니면 또 한 번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고 싶어졌는지 몰라도 결국 그 책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즐라타의 일기>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산 '양장본'이 되었다.

당시, 11세의 소녀 즐라타가 목도한 건 '민족정화'라는 이름의 끔찍한 또 다른 대학살이었다. '일곱 개의 국경, 여섯 개의 공화국, 다섯 개의 민족, 네 개의 언어, 세 개의 종교, 두 개의 문자, 하나의 국가'는 그녀의 나라인 보스니아가 속했던 (구)유고슬라비아연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종교도 인종도 다른 그들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기 시작했다.

일기 초반에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누렸을 아주 일반적인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가 끝난 후 피아노를 배우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여행을 가는 극히 평범한 삶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났다. 일기장에 따르면 1992년 3월 5일부터 불행은 시작되었다. (이는 정확하게 (구)유고슬라비아연방의 갈등이 심화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된 시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큰일 났다. 사라예보가 달아오르고 있어. 텔레비전 방송에 따르면, 일요일, 그러니까 3월 1일에는 무장한 시민들이 세르비아 결혼 하객을 죽이고 목사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고, 3월 2일, 월요일에는 도시 전체가 바리케이드로 가득 찼다고……. 천 개나 되는 바리케이드가 쳐졌단다."


폭격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그녀가 가장 슬픈 건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 게다가 전쟁 때문에 피아노도 칠 수 없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도 없다. 새 학기가 되어 산 노트에 필기를 하고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하는 건 이제 꿈이 되어버렸다. 그건 왜 전쟁을 하는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는 소녀에게도 충분히 가혹한 일이었다.

'학교에 가서 재미있게 놀지도 못하고 공부도 할 수 없어. 놀지도 못하고, 친구도 없고, 햇빛도 보지 못하고, 새들도 보지 못하고, 자연을 감상하지도 못하고... (중략)... 간단히 말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고 전쟁의 한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는 아이지.'

전쟁의 속내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아직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소녀의 눈으로 바라봤기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하며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좋아하는 음악과 책에 대해 이야기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그런 것들에게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전쟁은 한 소녀를 늙게 만들었다.

'내 생각엔 세르비아인들, 크로아티아인들 그리고 회교도들을 나누고 서로 미워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게 아닐까 싶어...(중략)... 정치라는 것이 세르비아인에게는 S자를 크로아티아인에겐 C자를 회교도에겐 M자를 제멋대로 붙여 놓고 그들을 갈라놓은 거야.'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행해진 이 잔인한 살육은 다행히도 즐라타를 비껴갔다. 하지만 그 행운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던 사라예보의 많은 어린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갔다.

가끔은 집과 학교 혹은 회사를 오가는 삶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하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즐라타의 일기>가 말해준다. 한 소녀의 절규가 담긴 이 책이 잊히지 말고 읽혀야 하는 이유는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 삶을 감사하게 여길 이유를 만들어 줄 테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저자 즐라타 필리포비치, 역자 왕철, 출판사 미래투자연구소, 페이지 248, 가격 5500원

빼앗긴 내일 - 1차세계대전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아이들의 전쟁 일기

즐라타 필리포빅 지음, 멜라니 첼린저 엮음, 정미영 옮김,
한겨레아이들, 2008


#즐라타의 일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대통령 온다고 수억 쏟아붓고 다시 뜯어낸 바닥, 이게 관행?
  3. 3 '한국판 워터게이트'... 윤 대통령 결단 못하면 끝이다
  4. 4 "쓰러져도 괜찮으니..." 얼차려 도중 군인이 죽는 진짜 이유
  5. 5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