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의 포스터.
tvN
"최근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사회적으로 많은 화제"라고 언급했다던 박근혜 대통령이 "젊은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남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을 한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바둑에서 말하는 '완생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던가. 지난 1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6차 청년위원회 회의에서 말이다.
"청년들의 구직난이 안타깝다"던 박근혜 대통령, 혹여 <미생>을 보긴 본 것일까. 이달 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중규직 제도' 도입을 검토한다던 정부가 최근 확정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보면, 정규직을 위해 그리 노력했던 2년 계약직 사원 장그래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본인이 원하는 하에서 최장 4년까지 계약직으로 일하라니. 그것도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최소 7년 이상은 일한 경력직인 35세 계약직 근로자에 한해서. 3개월 이상 근로자에 대한 퇴직금 지급, 정규직 전환 비이행시 이직 수당, 비정규직 계약 갱신 횟수 제한 등 보완책을 내놓았지만, "계약직 기간 늘리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만 줄인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이게 '장그래법'이라니, <미생>을 응원했던 세상의 '장그래들'과 <미생> 팬들의 열이 오르겠나, 안 오르겠나.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미생>을 지독하고 나쁜 쪽으로 오해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올해의 드라마'로 상찬 받으며 사회문화적 파급력을 보여줬던 <미생>에도 그렇게 해석할 요지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장그래법' 낳은 <미생>이 일궈낸 성과, 그리고... 계약직 사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파격, 지상파와 달리 재벌총수도, 러브라인도 없는 사실감과 담백함, 주조연 캐릭터 모두에게 애정을 아우르는 세심함, 그리고 이 세상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공감과 헌사. 성공한 드라마 <미생>의 미덕은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탄탄한 원작이 (팬들의 관심과 성원이란 밑바탕과 함께) 여타 장르의 콘텐츠로 파생돼 성공하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됐다(제발, 그러나 제발 뮤지컬만은 참아 주시라). 이를 기반으로 <미생>은 <응답하라 1994>를 이어 케이블 드라마의 시청률을 한 단계 끌어 올렸고, 연극판 출신 조연들을 발굴했으며, 광고·해외 판매 등 각종 수익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아마도 윤태호 작가의 후속작 역시 드라마의 성공과 관계없이 또다시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 성공을 뒤로 하고, 첩보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본그래'로 탄생한 <미생> 마지막회에 쏟아진 비판은 변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성대리의 '사랑과 전쟁'을 필두로 인기를 얻은 '대리들'의 분량 늘리기나 '꽌시'를 둘러싼 납득하기 쉽지 않은 과한 설정, 후반부 무리한 간접광고나 장백기-안영이의 러브라인 등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덜컹거림이 드라마 <미생>의 주제를 완성해 가는 작가·감독의 태도나 시선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기실, 문제제기만으로 인정을 받는 텍스트들이 있다. 이른바 선취의 미학. 윤태호 작가의 원작이 그랬다. 바둑을 그만두고 대기업 상사에 '낙하산' 고졸 계약직 인턴으로 입사한 장그래와 주변인물을 통해 바라 본 기업과 사회라는 그물망을 냉철하고 촘촘하게, 그리고 담백하고 현실감 있게 그린 작품이 바로 원작 만화 <미생>이었다. 반면 회당 3억 원, 20회짜리 이 드라마는 영상 텍스트가 줄 수 있는 과장과 현실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연대를 대체한 동료애와 인간애 극 초반, 원작과 비교해 과하게 주눅이 든 장그래의 초상은 '고졸 계약직'이란 주인공의 처지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흘러갔다. 장그래가 입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인 인턴사원 PT(피티) 장면 역시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구구절절했다. 원작에서 통찰과 관조로 기능했던 지문들은 임시완이란 배우를 통해 살과 숨을 얻으며 장그래의 내면의 풍경을 헤아리게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남발된 플래시백과 함께 전통적인 드라마의 서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더욱이, 끊임없이 장그래를 둘러싼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려 노력했다.
회당 70분이 넘어가는(마지막회의 요르단 내용이 삽입된 1회는 무려 90분에 달한다), 드라마 치곤 길고 긴 이 <미생>은 그렇게 볼품없고 핍박받는 고졸 계약직도 "'미생'에서 '완생'을 꿈꿀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과거 또다른 인턴사원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오상식 차장의 변화도, 끈끈한 동료애로 대변되는 영업3팀의 친화도, 말단 사원들의 고충을 담당하지만 장그래와는 계급이 다른 동기들도, (며칠 만에 무역 용어를 술술 외웠던) '숨은 능력자' 장그래의 정규직 획득을 염려하고 고민한다.
이를 위해 강조되는 것이 바로 저 동료애다. '연대'라고 말하기엔 거창하고 쑥스러운 '측은지심'과 같은 인간애 말이다. 사실 드라마 공히 오상식 차장으로 대변되는 그 인간애로는 장벽과도 같은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우리 모두 장그래나 김동식 대리였다가 오차장을 거쳐 (세상에 찌든) 박과장이나 마부장, 최전무의 부류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이 그렇지 않느냐고.
사무실의 디테일 하나 하나, 단역들까지 배우로 캐스팅하는 공을 들이고, 우리 모두의 직장 생활을 세심하게 '재현'한 <미생>은 일단 거기서 멈춰 선다. 그리고 꽤나 기이하게 현실을 '봉합'하려 든다. '미덕(<미생> 덕후, 즉 마니아)'들로부터 욕을 먹기 시작한 결말 부분의 어색함이 바로 거기서부터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