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어린이교통공원에서 저글링과 교통을 연계해서 교육하던 청년 이순만씨.
저글러 리쑨
"병원에서 두 달간 누워 있었어요.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서 물리치료도 2년은 받아야 된다대요. 다리 다쳐서 유치원 체육 선생님도 못할 것 같고, '뭐 먹고 산대?' 고민을 했어요. 제가 풍선은 자격증까지 있잖아요. 퇴원하고 풍선 하는 데를 찾아갔죠. 월급 안 받아도 좋으니까, 풍선으로 먹고 살 만한 수준으로 배워서 내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요." 풍선 가게 견습생, 사장님은 스물두 살 청년 순만에게 차비 하라고 한 달에 20만 원씩 줬다. 순만은 새로 문을 연 가게 앞에 풍선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큰 행사장에서는 피에로가 되어 풍선을 나눠줬다. 그는 인터넷으로 저글링 하는 피에로를 봤다. "우와!" 감탄한 순만은 공 세 개로 저글링을 연습했다. 풍선과 저글링 세미나가 있다면, 전국 어디라도 갔다.
그 때 '끼사'(끼 있는 사람들)라는 저글링 동호회를 알았다. 순만은 매달마다 서울로 가서 동호회 사람들에게 저글링을 배웠다. 공이나 링, 클럽을 던지고 받는 토스 저글링부터 디아블로(중국팽이 모양), 막대기, 외발 자전거까지. 교통사고로 부서졌던 슬개골 뼈도 잘 붙었다. 순만은 현역으로 입대했다. 부대에서도 저글링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2007년, 제대한 순만은 본격적으로 풍선 일을 했다. 월급은 100만 원,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서 생활인이 된 그에게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첫째가 태어나고 나니 생활이 안 됐다. 그는 사장님한테 "힘들어요" 하소연을 했다. 월급은 차츰차츰 올라서 150만 원. 순만은 실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풍선만 해서는 가장 노릇하기 어렵다. 차라리 공장에라도 취직을 하자.'그는 군산 기계공고 전기과 출신. 고3 1학기를 마치고 천안의 전기 판넬 만드는 회사로 취업을 나간 적도 있다. 도면 보면서 전기선 따는 게 재밌었다. '말뚝 박을까'도 생각했다. 일한 지 7개월째, 군산 서해대학에서 유아교육과 합격통지서가 왔다. 순만은 고3 때, 유아교육과 사람들이 손 유희(손으로 하는 율동)를 하면서 홍보하는 것을 봤다. 재밌어 보여서 원서를 썼지만 잊고 지냈다. 그 이후, 교장 선생님 추천으로 합격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기와 유아교육 전공은 순만의 구직 활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기소개서에 "저글링과 마술을 연계한 교통 교육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써서 군산시 어린이 교통공원에 취직했다. 전기시설 관리까지 겸했다. 스물여섯 살 청년 순만이 받는 월급은 180만 원. 생활은 빠듯해도 재밌었다. 날마다 연습해서 아이들에게 저글링을 보여줬다. 폭발적으로 실력이 늘었다.
"1년 반 동안 아이들에게 저글링 보여주면서 교통 교육을 하다 보니 (계속) 성장한 거예요. 그 때 전라북도에서 운영하는 '신나는 예술버스' 공연단을 알게 됐어요. 전에는 '군산 저글링 외발자전거' 동호회를 하면서 봉사의 개념으로 축제나 행사를 찾아다녔거든요. 저글링을 알리고 싶어서요. 근데 제가 돈 벌면서 저글링 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거죠. 2010년 봄에요."현실은 벅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