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늙는데 마음이 늙지 않는다... 그건 형벌"

[팔팔한 팔라완 기행12] 섬마을 아이들

등록 2015.01.12 14:02수정 2015.01.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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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대과일을 따다. (그린망고, 캐슈넛, 칼라만시)
열대과일을 따다. (그린망고, 캐슈넛, 칼라만시)강은경

'오전 내내 핼린이랑 열대과일을 땄어. 핼린은 계속해서 뭐든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먹이고 싶어 나를 끌고 다니기 바빴지. 통통한 아가씨가 어찌나 몸을 재게 놀리는지. 물론 나는 신바람이 나서 그녀를 따라다녔고. 

오늘은 아침부터 몸이 좀 피곤했어. 삼일 동안 더위에 시달린 탓인지, 낯선 환경 탓인지. 뭐, 샤워만 한 번 하고 나면 가뿐해질 것도 같은데. 씻지도 못하고, 땀범벅인 얼굴에 선크림만 발라대니, 피로가 풀리지 않는 거야.


아무튼 아침에 핼린이랑 그린망고를 땄어. 대나무 장대로. 망고를 썰어 소금이랑 젓갈에 찍어 먹었어. 엄청 시다. 혀뿌리가 오그라들고 침이 부글부글 솟는 게... 어라? 몇 쪽 먹다보니 자꾸 댕겨.

높은 가지에 달린 칼라만시는 핼린이 땄어. 가는 나뭇가지를 잘도 타고 올라가대. 탱자처럼 노랗게 익은 칼라만시는 처음 먹어봤지. 그것도 레몬처럼 톡 쏘는 신맛.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나무에서 막 딴 과일 맛이 어떤지 알지? 햇살 맛, 바람 맛, 하늘 맛... 시든 떫든 달든, 그 생생한 자연의 맛과 향기가 얼마나 죽여주는지.

아, 그리고 핼린이 마당가에서 불을 피우고 찌그러진 냄비에 캐슈넛을 구웠어. 아뿔싸, 불이 번져 풀밭을 홀랑 태울 뻔했지. 당황한 핼린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들고 불꽃을 쫓아다니며 두들기는데...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랑 나는 배꼽을 잡고 뒹굴었어. 식식대는 핼린의 모습이 어찌나 웃긴지. 그 바람에 캐슈넛이 새까맣게 타 버렸어. 숯덩이가 된 줄 알았지. 탄 껍질을 벗겨보니 노릇노릇 잘 익었더라고. 그 깊고 고소한 맛은 말로 표현 못하겠어.


나는 결국 점심 먹고 방에 들어 와 뻗어버렸어. 얼씨구, 콧물이 흐르네. 오싹오싹 식은땀까지 흐르고 말이야. 설마, 이 무더위에 감기? 내가 쉬겠다고 하니 핼린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래, 오늘 이 섬을 떠나기로 했는데, 정확히 몇 시에 출발할지는 모르겠어. 방카(배)가 준비되는 대로... 내일 떠날 수도 있다고 하고... '

이렇게 여행일지를 쓰고 있는데 미셀이 불렀다.


"강, 지금 가야 해요!"

나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오후 3시 30분, 방카에 올라탔다. 마침내 칼라우이트 섬을 떠나 부수앙가 섬의 코론 시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쉬이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핼린은 어디 있지?"

방카에 올라타며 미셀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선가 낮잠 자고 있을 거예요."

미셀은 몇 번째 같은 대답이었다. 갑자기 떠날 상황만 아니었어도, 나는 핼린을 찾아 바랑가이(마을) 오두막집들을 다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방카를 탈 때까지 핼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인사를 못하고 떠나자니, 못내 서운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작별인사

 섬 아이들
섬 아이들강은경

사실 나는 누군가와 헤어질 때면, 늘 인사가 짧았다. 손 한 번 살짝 잡았다 놓거나, '안녕!' 하거나. 그리곤 곧바로 돌아서 버린다. 이별의 아쉬움, 그동안의 고마움, 앞으로의 여정을 축복하는 말들을 길게 늘어놓는 작별인사가 불편했다. 멋쩍었다. 가슴 먹먹한 그 느낌을 빨리 끊어내고 싶어, 냉정하게 돌아선다. 이별에 강한 사람처럼. 그게 내 이별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안녕!' 그 한 마디도 없이 헤어지는 건 아닌데.  

핼린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미셀과 메이아는 코론 시로 돌아가기 위해 같이 섬을 나섰다. 내가 묵었던 집주인의 방카로. 집주인 내외와 막내딸도 방카(배)를 탔다.

이윽고 방카가 섬에서 멀어져갔다. 해변에서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어제 오후 함께 뛰어놀았던 아이들. 한 아이가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얼음!"

가지 말라는 말일까? 이어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땡땡땡땡!..."

잘 가라는 말일까?

 방카를 몰고 같이 바다로 나간 섬 소녀들
방카를 몰고 같이 바다로 나간 섬 소녀들강은경

어제 오후, 자넷의 오두막집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소녀들과 방카를 몰고 바다로 나갔었다. 그때도 핼린이 선두에서 지휘했다. 핼린과 내가 한 방카를 몰았고, 소녀 셋이 다른 방카를 몰고 쫒아왔다. 한 소녀는 스티로폼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우리는 서쪽을 향해 넓은 바다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닷물을 튕기며 노를 저었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맹그로브 숲에 방카를 세워놓고 모래사장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놀고 있던 사내아이들과 만났다. 아이들은 처음엔 낯가림하듯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거나 멀찍이 달아났다 돌아왔다.

 미셀이 주워준 조개껍데기
미셀이 주워준 조개껍데기 강은경

한참 모래사장을 뒹굴며 까불던 아이들이 차츰 내게 다가왔다. 새집을 들고 와 보여줬다. 메추리알만한 하얀 새알이 들어 있었다. 소라게를 집어왔다. 모두 숨을 죽이고 소라게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한 아이가 휘이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곧 소라껍질 속에 숨어 있던 게가 소리를 듣고 발을 밖으로 내밀었다. 몸을 반쯤 빼고 걷기 시작했다.

전기도 컴퓨터도 게임도 장난감도 없는 섬에서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자연과 맨몸을 비비며 커가는 아이들. 축복이라 말하고 싶었다.

또 나를 끌고 가 먹이를 물고 가는 뱀을 보여주었다. 초록색과 갈색이 섞인 가는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무줄기처럼 보였다. 깜짝이야! 놀라는 내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짓궂게 웃었다. 아이들은 또 사진을 찍으라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나는 몸짓발짓으로 아이들에게 '얼음땡' 놀이를 가르쳤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핼린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먼저 돌아간 후였다. 나는 그냥 한국말로 떠들었다.

"네가 술래야! 쫓아가!... '얼음' 외쳐야지! 아니, 아니 멈춰!.... 그때 '땡' 하고... 그래 그래!... " 

놀이의 규칙을 익힌 아이들이 목청껏 '얼음! 땡! 얼음! 땡!' 복창하며 옆으로 뒤로 앞으로 모래사장을 내달렸다, 얼었다, 도망쳤다, 멈췄다... 정신없이 깔깔거리며. 고꾸라져 얼굴을 모래사장에 박아가며. 바다가 석양빛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나도 모래사장을 뛰며 뒹굴었다. 모처럼 천진한 무리 속에 끼어 팔팔 나는 것처럼. 그러나 곧 지쳐 나가떨어졌다.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마음이 늙지 않는 건 형벌"

 섬 소녀들
섬 소녀들강은경

사진작가 안승환 선생이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별명이 '만년 청년'인 안 선생이, 그날도 젊고 높은 특유의 어조로 말했다.  

"은경아, 너 그거 아니? 나이가 들수록 말이야. 마음은 그대로 이팔청춘인데 몸은 늙어 가. 마음과 몸의 나이가 점점 더 벌어지는 거지.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람 미친다니까. 은경아, 알아? 마음이 늙지 않는 게, 어떤 땐 형벌 같다는 거 말이야. 사람 미쳐, 미쳐!"

오십 줄이 되어서야, 이제 내가 안 선생의 그 말을 이해하게 됐나 보다. 지치지도 않고 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혼자소리를 했으니. 헉헉 거친 숨을 뱉으며, '우씨, 힘들다! 미치겠네!'

칼라우이트 섬을 떠난 방카가 남쪽으로 향했다. 더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짧은 작별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우리가 어디서 다시 만날 수나 있을까? 미소, 오해, 기쁨, 눈물. 모든 시간과 인연들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짧은 기억의 온기 혹은 냉기만 남기며. 그 기억도 머잖아 스러질 것이었다. '사는 게 그런 거지' 하는 게, 특히 여행에서 실감하는 거였다.

 소라게, 새알, 뱀
소라게, 새알, 뱀강은경

 노을 바다에 방카
노을 바다에 방카 강은경

오후의 햇살이 눈부신 잔잔한 바다였다. 제인이 쉬어가자고 했다. 작은 무인도에 내렸다. 백사장이 아름다운 섬이었다. 다들 옷을 입은 그대로 풍덩풍덩 바다로 뛰어 들었다. 산호초가 깔린 바닷물 속으로.

나만 몸을 웅크린 채 백사장에 앉아 있었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오싹오싹 한기가 더 심해졌다.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셀과 메이아가 들어오라고 자꾸 손짓해 부르는데.

잠시 후, 바다에서 나온 미셀이 작고 예쁜 소라껍데기와 고동껍데기들을 한 주먹 주워왔다. 내 손에 옮겨주었다. 그때 차르르, 맑은 소리가 일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작별인사처럼.
#팔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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