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길 따라... 이순신의 '긍정' 맛보기

지리산과 섬진강변 따라 가는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

등록 2015.01.22 09:38수정 2015.01.2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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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모습. 구례 구만저수지 앞 도로변에서 벽화로 만난다. ⓒ 이돈삼


해가 바뀌면서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시각이 절실해진다. 이순신 장군이 떠오르는 이유다. 장군은 매사 긍정적이었다. 평소 기쁘다, 다행이다, 해낼 수 있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상황이 녹록지 않았지만 장군은 긍정적인 면을 먼저 봤다.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떠올렸다. 죽기로 싸우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도 같은 의미다.


이루려고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춰 추진하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새해를 맞은 우리 모두가 되새겨봐야 할 말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간다.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서 시작되는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다. 지난 4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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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의 출발점에 설치된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삶. 구례 계척마을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은 1597년 4월 1일 시작됐다.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겪고, 의금부에 투옥됐다가 구명 운동에 힘입어 백의종군을 명받은 직후였다. 아무런 직위도 없이 평범한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우라는 형벌이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의금부에서 풀려나 초계(경남 합천)에 있던 도원수 권율의 진영으로 찾아가는 노정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받기 전까지 4개월여 동안 걸었던 길이다. 길은 한양에서 충청, 전북을 거쳐 전남 땅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전라선 철도의 흐름과 상당 부분 궤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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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산수유나무. 산수유 시목지로 알려진 구례 계척마을에 있다. 계척마을은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의 시작지점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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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서시천의 징검다리. 구례군 산동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 이돈삼


이순신은 남원에서 밤재를 넘어 구례 땅을 밟았다. 마을 주민이 열렬히 환영했다.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일군 계척마을이었다. 첫 번째 산수유나무로 알려진 산수유 시목지(始木地)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옛 성터가 재현돼 있어 그날의 함성을 되새겨볼 수 있다.


길은 여기서 산동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봄이면 노란 산수유 꽃망울로 꽃대궐을 이룬 산기슭이다. 집에서 산수유 열매를 말리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마을 풍경도 시간이 비켜선 것처럼 소박하고 정겹다. 지리산 만복대와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도 우람하게 뻗어있다.

산수유마을에서 시작된 서시천을 따라 뉘엿뉘엿 걸으면 운흥정과 만난다. 개울가의 바위벽에 걸쳐진 정자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바위벽을 휘감아 돈다. 오래 전, 지역의 선비들이 돈을 내서 세운 정자다. 옛사람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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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산수유나무. 봄엔 노란 산수유꽃으로 꽃대궐을 이루더니 가을부터 겨울엔 빨간 열매로 계절의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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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낙네가 산수유 열매의 과육을 햇볕에 말리고 있다. 이맘때 산동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이돈삼


구만 저수지에 들어선 지리산 수상레저 타운은 스산하다. 추운 날씨 탓에 수상스키도, 오리보트도 움직이지 않는다. 젖소를 놓아기르던 치즈랜드도 적막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천변 길이다.

길은 우리 밀 체험관을 지나 서시천 제방을 따라간다. 봄이면 벚꽃으로, 여름이면 원추리로 꽃물결을 이루는 둔치다. 나비와 매미, 풀벌레 소리 요란하던 둔치도 호젓하다. 물오리와 이름 모를 철새들만 물 위에서 노닐고 있다.

이순신이 구례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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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에 있는 손인필 비각. 비각 주변으로 공원 조성사업이 시작됐다. ⓒ 이돈삼


백의종군하며 걸었던 이순신의 체취는 구례읍에서 제대로 만난다. 백의종군 기간 난중일기에 자주 언급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손인필이다. 구례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운 관군 지휘관이었다.

백의종군에 처한 이순신을 모든 일 다 팽개치고 밤재까지 달려와서 맞이한 사람이 그였다. 뿐만 아니다. 백의종군 끝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구례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그였다.

당시 이순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환대하고 도왔던 손인필의 비각이 구례읍내에 있다. 공설운동장에서 구례읍사무소로 가는 길목, 구례읍 봉북리 도로변이다. 지금은 비각만 덩그러니 서 있다. 하지만 최근 시작된 공원 조성 사업이 마무리되면 근사한 공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손인필 비각에서 가까운 구례읍사무소는 당시 구례 현청이 있던 자리다. 이순신 장군이 구례에 있을 때 자주 머물던 곳이었다. 읍사무소 앞에 500년 넘게 산 팽나무 고목이 의연하게 서 있다. 장군이 드나들던 그때 그 시절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했던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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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례현청 터에 들어서 있는 구례읍사무소 전경. 읍사무소 주변에 선 고목이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지켜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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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구례현청 터에 복원된 명협정. 이순신 장군이 자주 들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공간이다. ⓒ 이돈삼


현청 앞에 있던 명협정도 사료를 토대로 지난 12월 복원됐다. 당시 유적 복원 사업의 시작이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자주 들러 머물면서 체찰사였던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생각을 나눴던 공간이다.

구례읍에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 쪽으로 가면 강변에서 용호정과 만난다. '절명시'로 널리 알려진 매천 황현의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지역의 유림들이 울분을 달래면서 문학으로 항일하던 거점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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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에 자리한 용호정. 유림들이 울분을 달래면서 문학으로 항일하던 거점이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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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과 지리산 풍경.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도 접했을 풍경이다. ⓒ 이돈삼


용호정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도 이순신 장군이 순천부로 오가면서 건너다녔다. 난중일기에는 잔수강으로 적혀 있다. 긴 강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한 섬진강의 또 다른 명칭이다. 잔수강은 구례와 순천 황전 사이 강을 가리킨다. 이 강변에 놓인 나무 데크와 둔치를 따라가면 옛집 운조루로 연결된다.

토지면 송정리에 있는 석주관도 의미가 깊다.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석주관성도 일부 복원돼 있다. 석주관 앞에는 또 당시 순절한 왕득인 등 일곱 의사와 구례현감 이원춘의 무덤이 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준 그들이었다. 온갖 편의를 다 제공한 데서 머물지 않고 나라를 위한 전쟁에도 앞장서 싸웠던 그들이었다. 결국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내놓은 그들이었다. 그 앞에서 누구나 숙연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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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석주관 풍경.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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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 나무데크 길.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도 거닐었을 강변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곡성 나들목에서 곡성읍을 거쳐 고달면소재지에서 우회전, 고산터널을 넘어가면 구례 산동으로 연결된다. 산동에서 남원 방면으로 19번 국도를 타면 조금 가면 계척마을 입구에 닿는다.
#손인필비각 #명협정 #석주관 #칠의사묘 #이순신 백의종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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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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